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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속 완판의 힘' 창의·내공·인문학…원창 이주림 화백

대한민국미술대전 최연소 특선…압도적 화폭·웅장한 선 "어메이징" 찬사

박지영 기자 | pjy@newsprime.co.kr | 2015.11.05 08:17:12

[프라임경제] 시서화 삼절의 천재작가·움직이는 자전(字典)·붓질의 장인·청년거장·스타작가….

원창 이주림 선생을 일컫는 수식어들이다. 소설가 곽의진은 원창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그의 붓질은 참 거칠고 자유롭다. 자유로우면서도 율(律)을 지킨다. 율을 지키면서도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는 신동(神童) 아니면 천치(天癡)다. 붓을 들었을 땐 천재적 신기를 보이지만 곡차 한 잔을 들면 천진함의 극치를 보인다."

천재적 신기와 천진함을 오가는 원창 이주림 화백. = 박지영 기자

원창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서른 셋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부문에 특선으로 최연소 입선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의 어린시절을 잘 알고 있는 주변사람들은 이미 예견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원창이 처음 붓을 손에 쥔 건 다섯 살 때였다. 부친 이성도 선생 뜻에 따라 그 무렵 서예를 배웠고, 초등학생 땐 이미 사서삼경을 뗐다. 또한 동서양 인문학을 읽으며 소양을 쌓기도 했다.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여초 김응현 선생과 연이 닿으면서다. 여초를 스승으로 삼으며 동방연서회에서 밤낮 없이 서예를 익혔다. 20대 때부터 한국미술협회 정식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밑바탕 덕이 컸다. 

원창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스물네 살 때 서화연구소를 설립했고, 스물아홉 살 때 개인전을 열었다. 40~50대에나 했을 법한 일들을 이십대 때 모두 해치운 셈이다. 물론 일각에선 '한창 배워야 할 나이에 너무 당돌한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당시 40~50대에나 했을 법한 일들을 벌였다. 무모하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나이까지 누군가의 제자로 배우기를 계속했다면 당연히 개인전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홀로서기는 성공적이었다. 2007년 미국 한인이주 104주년 기념식 땐 특별초대전에 초청돼 즉석 퍼포먼스를 벌이며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당시 주요 매체들은 원창의 묵 퍼포먼스를 앞 다퉈 다루며 "압도적 화폭과 웅장한 선의 흐름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고 전했다.

원창 이주림 선생의 매화병풍. ⓒ 원창서화연구소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10년 처음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 때였다. '해남 촌놈'이었던 원창은 인사동 전시대관료가 일주일에 200만원 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의 10배였다. 일주일 대관료가 고작 11만원 빠진 1989만원에 달했다.

주변인들이 그를 만류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지방도시에서 열자. 서울에서 전시회 열었다가 빚지고 망한 사람 여럿이라더라'는 회유에도 원창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떼를 쓰듯 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결국 인사동 갤러리서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원창은 전시회에 60여점을 내걸었고, 그중 14점을 팔았다. 나름의 선전인 셈이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4회·입선 16회, 이십대 때 한국미술협회 회원이 되고 지금까지 걸어온 마흔 일곱 원창 이주림 선생 발자취다. 서예부문 최정상에 오른 원창이지만 그는 늘 목이 말랐다. 글자에 그림을 더한 '서화'로 폭을 넓힌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원창 이주림 선생의 강변의 추억. ⓒ 원창서화연구소

"서화 하나를 그리더라도 내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를 옮겨 놓는 방식도 있지만, 작품 속엔 깊이가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인문학이 내재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구단을 외워 옮기는 식 재주가 아닌 예술다운 창조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

원창은 후배들에게 도제식 교육(徒弟式敎育: 문하생이 기성 작가와 숙식을 함께하며 배우는 방식)을 내치라고 가르친다. 자신에게 내재돼 있는 창의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가뜩이나 기술적으로 복잡한 세상인데 작품까지 사람들을 복잡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

이러한 고집은 '개인전 4회 연속 완판'의 원동력이 됐다.

"강매를 한 것도 아닌데, 다 팔렸다. 장사가 잘 됐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먹을 갈아 붓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계속 해서 다 팔렸다는 것은 관객이 그 그림을 갖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공감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고, 작가와 관객이 작품으로 제대로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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