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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영국 국왕소추법과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의미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7.03.10 10:17:56

[프라임경제] 원로학자 박은정 전 한국법철학회 회장(이화여대 교수 역임)은 "법은 막강하며 권위적이고 명령적인 언어이다. 우리는 법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법치주의라는 말은 오늘날 다순히 법률적인 개념이기를 넘어 문화적 개념으로 승화돼 있다"고 말한다(2007년 초판이 발행된 '법철학의 문제들').

누구나 법이 강제력이 있고 그 구속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지키든 안 지키든, 적어도 그런 대전제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막상 정권 최고위층에 대해서 만큼은 이런 상식적이고 교과서적인 잣대를 똑같이 대는 자체가 금기시됐던 것도 사실이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대북송금이 절차적 문제를 일으키면서 초법적으로 이뤄진 것에 대해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추진되자, 일명 '통치행위' 항변이 나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제도 위에서 군림하고 통치하는 국가원수와 그 보좌 기구들이 있다는 인식은 법률의 엄격성이 누구에게나 공평무사하게 적용된다는 인식이 확립되는 데 큰 장애요소가 돼왔다. 이런 와중이니 법치주의가 문화적 개념으로 승화된다는 것은, 어쨌든 현실세상의 한국에서는 아예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2017년 3월10일을 기점으로 우리는 법치주의의 기념비적인 문서를 갖게 됐다. 헌법재판소는 그동안 국회가 제출한 탄핵소추 사유 13가지를 5가지 쟁점으로 추려 심리를 진행해왔고, 이제 그 선고가 이뤄진다.

5가지 쟁점은 △최순실씨 등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주권주의·법치주의 등 헌법 원칙 위반 △CJ 등 민간기업 인사 개입과 공무원 부당 좌천 등 대통령의 권한 남용 △'정윤회씨 사건 보도'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 침해 △'세월호 사건' 당시 업무를 게을리한 점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뇌물 등 형사법 위반 등이다.

대통령을 파면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이미 탄핵 절차를 진행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시 정파적 이익에 매몰된 발언을 한것이 선거법상 중립 의무 위반이냐는 문제에 한정된 극히 실험적인 검토에 불과했다.

어느 정도의 잘못이 있어야 국회의 탄핵소추가 헌법재판소로부터 인용되는가에 대한 의미가 있었을 뿐이라 그 의미가 한정적이고, 또 당시 여러 정당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탄핵이 과도하게 추진되면서, 민의가 왜곡됐다는 문제도 있었다(유권자들의 격앙된 반응으로 대단히 많은 기성정치인들이 그 다음 총선에서 낙선한 것이 그 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그 적용되는 이슈들이 대단히 광범위하며 원론적이다. 나쁘게 이야기하면 추상적인 이슈들이지만, 국정을 일명 실세 인사가 농단했다는 문제와 그 여파로 빚어진 일들은 생생하기 짝이 없다.

청와대의 말 한마디에 대기업의 오너 일가마저도 자리를 내놓고 외국으로 떠돌아야 하며, 정직하게 일하는 공무원은 "나쁜 사람"이라는 부당한 평가를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언론이 공들여 쓴 기사는 '가십성 지라시 취급'을 받고 회사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촛불집회와 맞불성으로 일어난 태극기집회 등 격렬한 대립이 있기는 했으나, 이 점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아보자는 제도적인 틀 안에서 해결의 기회를 잡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촛불집회의 성난 군중심리가 당장 박근혜 대통령을 물리적으로 청와대 밖으로 쫓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1960년 4월에 혁명을 치러봤고 그 성공도 경험했지만 그런 비상 수단의 힘만으로는 정치와 제도의 확립을 완성할 수 없다는 점도 이미 학습했다.

위의 논점들을 보면, 우리가 그간 감히 제왕적 대통령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모든 사항에 대해 이제 존중하고 준수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 의결서 송부로부터 오늘 선고일까지 총 92일간 격무에 시달리며 논리 점검과 치열한 논쟁을 통해 내용을 검토하고 문장을 다듬은 덕분에, 우리는 이제 저 명제들에 대해 길지만 명확한 설명을 하는 문서를 갖게 됐다.

논점들이 모두 인정되고 박 대통령이 저 논점들 전체에 대해 파면 사유를 인정당하는 일이 일어날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의 경우의 탄핵 논점이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세속적으로 궁금하긴 해도, 국정의 최고통수권자인 박 대통령이 개별 해난 사건 하나에까지 디테일하게 모든 것을 챙겨야 한다고까지 명령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탄핵이 인용되든 혹은 기각이나 각하되든 간에, 저 논점들에 대해 전적으로 국민 개개인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일부만 동의하든 간에, 우리는 이제 저 많은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논리적인 검토의 경험과 그 정도의 척도를 갖게 됐다.

이런 점은 앞으로 누구든 간에 헌정 기본틀을 의식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공무원은 적어도 내 직무와 직분에 충실하다면 어떤 실질적인 압력에도 정정당당하게 따지고 떳떳하게 소신을 펼칠 수 있게 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서, 개별 문제의 정도에 대한 논란은 추가로 있을 수 있으나 국가와 정부가 소중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고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선언적인 내용이 발표될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국민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이 다스림의 대상이 될 뿐인 신민의 상황을 벗어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제 군주정의 신민이 아니라, 당당하게 민주자유주의 국가의 납세자로서 어떤 가이드라인을 정치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근거 문서를 얻게 됐다.

영국인들은 문서로 청원할 때, "I, a tax-payer…(납세자인 나는…)"으로 자랑스럽게 주권자이자 국가망을 부양하는 원동력을 공급하는 자임을 내세우면서 글을 시작한다고 한다. 그것은 영국인들이 왕의 목을 잘라본(찰스 1세 처형과 크롬웰의 공화정 수립)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랜 재판과 시스템 정비를 통해 납세자인 국민 개개인이 왕이라는 개념을 쌓아왔기 때문이다.

멀리는 1200년대의 대헌장부터, 1950년대에야 비로소 정부도 잘못을 할 수 있고, 그렇다면 배상을 해줘야 한다는 내용의 명시적인 법(국왕소추법)이 등장하기까지 수도 없는 문서들이 쌓여왔다.

우리도 이제 그런 '문서'를 갖게 됐다. 오늘의 결정문은 그런 의미를 갖는다. 탄핵 여부에 따른 개인적 소회와 찬반 이견이 있을지라도, 이런 비싼 문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모두 즐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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