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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침묵의 카르텔'이 필요할 때도 있다

 

김희정 세종대 겸임교수 | press@newsprime.co.kr | 2017.05.05 18:47:39

[프라임경제]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드라마급 시청률로 유권자의 표심을 흔들던 TV토론도 끝났고 여론조사 공표도 금지됐다. 5월9일, 당선자 신분 없이 즉각 대통령이 될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 후보들은 유권자를 찾아 전국을 주유하며 각양각색의 유세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문재인 후보는 '스킨십 유세'를 벌이고 있다. 광장을 찾아 수많은 인파와 함께 하지만 목청 높여 연설하기보다 한 사람 한 사람과 접촉을 중시한다. 유세차량에 오를 때나, 유세장을 빠져나갈 때나 인파속을 헤집고 드나들며 최대한 많은 이들과 악수하고 몸을 부대낀다. 상당한 체력과 시간이 소모되지만 한결 같은 문 후보의 표정을 보면 유세팀의 전략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듯 하다.

홍준표 후보는 '전국노래자랑 형' 유세를 하고 있다. 부산에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대구에서는 '홍도야 우지마라', 대전에서는 '대전 블루스'를 불렀다 하니 지역 맞춤형 레퍼토리가 상당하다. 노래로 흥을 돋우면 샤이보수의 기가 살아날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회귀한 듯 한 홍 후보의 유세는 보수 유권자의 의식수준을 다양하고도 독창적으로 떨어트리는 모양새다.

안철수 후보는 도보유세를 하고 있다. '걸어서 국민 속으로'를 표방하며 유권자 한명 한명을 만나고 있다. 거리에서 만난 국민의 사연을 전할 때는 실감이 나고 스토리텔링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러나 사전투표까지 개시된 이후 시작한 도보유세는 신선하다기 보다 독단적으로 보인다. 후보가 자신의 지원군인 가족과 선대위를 따돌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참으로 실험적이지만 진정성을 남기는 것 외에 승부에 도움이 될지는 갸우뚱 하다.

유승민 후보는 미모의 딸이 지원유세를 하며 국민 장인으로 불리고 있다. 후보인 아버지보다 딸인 유담 양이 시민과 사진을 더 많이 찍었다고도 한다. 수많은 사진을 찍다보니 성희롱까지 당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으며 성희롱 포즈를 취한 남성은 국민수배령이 내려진 웃지 못할 상황이다.

심상정 후보는 '요망진(야무지다는 뜻의 제주 사투리)' 유세를 하고 있다. 제주도에 갔을 때 시장상인이 "TV토론을 보니 말을 너무 요망지게 잘 하더라"며 칭찬하자 '요망진' 심상정이 왔다며 즉석에서 받아넘길 정도로 순발력 있는 연설을 한다. 원고 없이 45분간 연설을 했다고도 한다.

후보의 유세 스타일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장기가 드러난다. 그 중 말을 가장 잘하는 후보는 단연 심상정 후보다. 단순히 말을 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TV토론 이후 심 후보는 지지율이 두 배 가량 상승했다니 전무후무 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서구에 비해 말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든지 '이심전심'이라든지 말없이 통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간 극심한 불통의 시기를 거치면서, 침묵은 금이 아니고 나쁜 생각의 전조일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이제 말을 잘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토론에서 보여준 심상정 후보 말의 핵심은 공격과 위로였다. 강자는 공격하고 약자는 위로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문재인 후보를 공격하는 심 후보는 어눌한 문 후보를 상대로 연속 타점을 올리는 홈런왕 같았다. 강자를 공격하는 모습, 누구나 반할 만 하다.

골리앗에게 덤비는 다윗, 비장미가 흐르지 않는가. 그러나 심 후보는 다윗처럼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보다는 줄에 묶인 거인에게 사정권 밖에서 덤비는 것처럼 안전했다.

선두 후보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1위 후보에게 부여된 온갖 기대와 검증, 공격의 꼬투리를 지뢰밭처럼 건너 모범답안을 건네야만 하는 숙명이다. 반면 심 후보는 몸이 가볍다. 소수를 대변하기에 소신이 넘치고 약자를 옹호하기에 약속하기 쉽다.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심 후보에게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넘어 표를 주는 순간 진보가 바라는 정권교체의 동력은 힘을 잃어간다.

타고난 입심을 자랑하는 홍 후보를 공격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보수까지 껴안아 국민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문 후보에 비해 거칠 것이 없다. 누구나 선두인 문 후보 공격을 목표로 할 뿐 심 후보를 상대로 칼을 갈지는 않는 것이다.
심 후보는 카드의 조커와 같다. 그저 맹공, 꾸짖고 공격하면 소수의 지지자들은 통쾌함에 희열을 느낀다.

심 후보가 공격만 한 것은 아니다. 위로도 했다. 유승민의 완주를 격려하며 공감하고 위로했다. 공감하지 못하는 전 대통령에게 좌절한 국민들 앞에 새로운 여성 정치인이 보여준 위로는 썩 괜찮은 것이었다.

그러나 심상정의 위로는 순수한가. 유승민을 위로하는 심상정의 구호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웠지만 유승민 후보에게는 어떤 것이었을까. 당선권인 문 후보를 진보의 뒷배로 둔 심후보의 입장과 몰락한 보수에서도 서자 취급 받는 유 후보의 입장 차이가 더 서글프게 와 닿지는 않았을까.

왜 심상정의 위로는 유승민의 표정을 한순간도 바꾸지 못했을까. 왜 유승민은 심상정의 위로를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것처럼 보였을까.

심 후보는 한 유세장에서 "지금 이곳에 보수가 있다면 나를 찍지 말고 유승민 후보를 찍으라"고 했단다. 얼핏 듣기에 미담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심 후보 유세장에 보수가 몇 명이나 서있었겠으며 있다고 한들 심 후보의 말을 듣고 유 후보를 찍겠는가.

미국의 유력 시사주간지인 '타임'지가 문재인 후보를 아시아판 커버 인물로 취재했다. '협상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문재인은 김정은을 상대할 리더가 되려한다'는 부제가 달려있어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차기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난제가 산적한 곤궁한 처지의 대한민국을 책임져야 한다. 무엇보다 북핵 위협 앞에 강력한 리더십을 필요로 하며 리더십의 원천은 국민의 신뢰요 공고한 지지다.

책임 있는 말이 절실하다. 이제 말잔치에서 깨어나 현실을 따져보자. 진실하지 않은 말로 생색 좀 그만내자. 말로만 생색내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김희정 세종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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