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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주진형 사장을 잘못 봤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왜곡했던 '광기의 시대' 끝났나

이수영 기자 | lsy@newsprime.co.kr | 2017.05.31 11:41:48

[프라임경제] "국민연금이라는 곳은 남의 돈을 맡아서 관리하는 '수탁자'다. 수탁자는 돈을 맡긴 사람의 이익을 위해 일할뿐 독자적, 정책적 판단을 내리며 좌지우지하면 안 된다."

'유리지갑' 월급쟁이들 속을 뻥 뚫어준 사이다 발언으로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이 이슈 한 복판에 재등장했다. 작년 최순실 국정농단 국회 청문회 당시 재벌총수 8인 면전에서 재벌을 속칭 '조폭'에 비유해 대중을 사로잡은 지 반년여 만이다.

2013년 9월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에 오른 그는 작년 3월 사퇴하기까지 금융투자업계의 이단아 혹은 돈키호테로 불렸다.

그가 지난해 4·13 총선을 1개월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국민경제상황실 부실장으로 변신했을 때, 필자는 자필기사 제목으로 '주진형의 야당본색'이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달았다.

삼성증권 경영전략실 상무, 우리투자증권 리테일본부장 등 대형사 고위 임원을 거친 그였지만 주진형식(式) 경영스타일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그랬다. 

익숙하지 않았고 속된 말로 '돈은 안 되면서 고생스러운 숙제들'만 3년 가까이 쌓였으니 자본을 굴려 더 큰 자본을 만드는 게 본업인 금융투자사로서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가.

심지어 그가 취임하기 전인 2013년 3월 기준으로 한화투자증권의 경영성적은 좋지 않았다. 영업적자 667억원, 당기순손실이 713억원에 달했으며 한화그룹은 크지만 증권사로 '한화'는 마이너리거였다. 2012년에는 금융상품 불완전판매를 단속하는 금융감독원 미스터리쇼핑에서 증권사 최하등급을 받기도 했다.

어느 때보다 빠르고 확실한 '성과'가 필요한 때 사령탑을 맡은 주진형 사장은 광폭행보로 단숨에 업계의 관심을 모았다.

그해 겨울 한화투자증권은 극단적인 긴축경영에 돌입해 전 직원의 20% 이상을 감원하고 임금을 삭감했다. 또 사장 이하 모든 임원들이 연봉의 일정 비율로 회사 주식을 사들여 퇴직할 때까지 보유하는 '임원 주식 보유제'를 업계 최초로 도입했는데 보통 자사주 취득은 지분가치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다.

개인투자자 보호와 신뢰회복을 내세워 레버리지펀드 신규판매를 중단하고 거래수수료 정액제를 도입해 불필요한 수수료 경쟁에 제동을 걸었으며, 리서치센터가 발행하는 종목 리포트에 '매도(sell)' 의견을 전체 분석대상의 40%까지 늘리기로 해 파격의 정점을 찍었다.

실제로 주 사장은 리서치센터 회의에 직접 참석해 애널리스트의 분석 내용을 꼼꼼하게 챙겼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게 그 유명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반대' 리포트다.

2015년 6월 김철범 리서치센터장이 주도한 두 건의 리포트를 요약하면 간단하다. 합병이 무산되면 보유하고 성사되면 바로 차익실현, 즉 팔라는 것이다. 2년이 다 돼서야 다시 빛을 본 리포트의 제목은 '소액주주를 위한 투자전략 제안'이다.

주 사장은 29일 언론 인터뷰에서 문제의 합병을 '백주대낮에 강도짓'으로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백주에 강도짓이 벌어지는데 모두들 딴청을 하거나, 아니면 '아무 문제 없다' '다른데 가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보고 심통이 났다.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보고서를 만들어야지."

대쪽 같은 발언으로 최근 대중적 호감도가 높아졌지만 사실 현직시절 주진형 사장은 비호감 CEO였다. 그중에서도 영업점과 애널리스트들은 특히나 그를 기피했다.

일례로 취임 1년 만에 애널리스트 15명이 회사를 떠나 리서치센터는 반 토막이 났고 수수료 정액제와 성과급 폐지가 역풍을 맞으면서 법인영업, 개인 브로커리지 등 핵심부서 인력도 줄줄이 등을 돌렸다.

당시 모 센터장은 필자에게 "할당량을 내려 매도 리포트를 독촉하고 내지 않으면 범죄자처럼 매도하는 바람에 직원들이 지친 모양"이라며 "업계 생태를 무시하는 주 사장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불편해한다"고 귀띔할 정도였다.

마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배임혐의와 관련한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아 복귀가 임박한 시점과 맞물리면서 한화투자증권은 그룹으로부터 대규모 경영진단을 받기도 했다.

같은 해 초 삼성증권이 그룹 경영진단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듯 한화도 비슷한 수순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20명 넘는 그룹 인력이 파견돼 인사와 리테일, IB(기업투자), 전산 등 거의 모든 영역을 '현미경 검사'했다는 뒷말이 나왔다.

주 사장은 중도낙마를 피했지만 삼성물산 합병 반대 보고서로 그룹 경영기획실장으로부터 '최후 경고'를 받은 것은 반년이 흐른 뒤 벌어진 일이다.

"고통을 받는다고 절망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며 그 고통이 아무리 심하다 하더라도 절망에 몸을 맡기는 것은 가장 소심하고 한심한 일이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作 '돈키호테' 중에서)

최근 한 시민단체 간부는 짧게는 지난 9년, 길게는 지난 반세기를 통틀어 '광기의 시대'라 칭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왜곡되고 병든 권력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게 가능했던 모든 것을 이르는 것이었다.

수탁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투자정보를 제시함에 있어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으며, 객관적이면서도 이성적인 판단에 따르는 것은 증권사뿐 아니라 모든 금융기관의 기본이다.

유별난 이단아, 몽상가 취급했던 이의 과거가 지극히 정상적인 소신행보로 재평가 받는 오늘, 과거의 나 역시 주진형을 잘못 봤음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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