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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범석의 벤토탐방] 저가벤토 vs 고가벤토

"벤토 알면 문화 보이고, 문화 알면 일본 보인다"

장범석 푸드 칼럼니스트 | bsjang56@hanmail.net | 2017.06.27 10:33:28

[프라임경제] 일본 상점가에 가면 '게키야스(激安)'라는 단어가 붙은 물건이 눈에 띈다. 아주(激) 저렴하다(安)는 의미다. 그러나 다른 데는 몰라도 음식에 이 말이 붙으면 왠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쓸 수밖에 없는 벤토가 있다.

'키친DIVE' 200엔 벤토. ⓒ Foodfighter 홈페이지

일본경제에 거품이 꺼지고 침체가 장기화되자 대도시를 중심으로 200엔대 벤토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김밥이나 샌드위치 같은 패스트푸드 종류가 아니었다. 흰 밥에 메인반찬(튀김류)이 있고 밑반찬도 들어있는 전통 벤토 형태였다.

다만 기존 벤토와 달리 벤토에 이름이 없었다. 그 이유는 그때그때 저렴한 식자재를 사용하므로 균일한 내용물을 연속 공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를 통칭해 '저가 벤토'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 벤토는 쌀과 야채를 제외한 부식 대부분을 외국(주로 중국)에서 대량 가공해 냉동상태로 들여온다. 생산원가를 최대한 낮추기 위해서다. 어떤 때는 유통기간이 임박한 국내산 식자재를 사용하기도 한다. 

200엔대 벤토의 원가율은 대략 60%다. 여기에 용기 값과 인건비를 더하면 추정이익이 10~20엔에 불과하다. 벤토와 함께 세트로 나가는 녹차 같은 음료 부문에서 매출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칫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가격구조다. 

이전에도 가격이 싼 벤토가 있었지만, 저가 벤토가 새로운 카테고리로 정착한 시기는 2007년경이다. 현재는 '키친DIVE' 같은 체인점을 필두로 이온(AEON)·이토요카도·세이유(西友) 등 전국단위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팔고 있다. 

연금수입으로 생활하는 노년층이 주 고객이지만 젊은 알뜰족도 적지 않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실속파는 있기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저가 벤토가 건강을 해친다는 목소리도 있다. 

식품 컨설턴트 카와기시 히로카즈는 '여성자신' 지난해 6월14일호에서 "밥은 대부분 묵은 쌀을 사용하고, 야채반찬류도 유통기간을 늘리기 위해 염분비율을 높인다. 또 육류 재료에는 콩 단백질을 섞어 양을 늘리기도 한다.

이러한 식사를 계속하면 미각과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어린이는 피하는 편이 좋다"며 경종을 울린다.

하지만 그는 "물론 싸고 양심적인 가게도 많다. 가령 마감시간이 임박한 슈퍼마켓이 할인 가격표를 붙인 벤토라면 대체로 안심해도 괜찮을 것"이라며 합리적 구입 팁도 공개한다.

택배 벤토 전문회사 '고치쿠루(ごちクル)'는 웹사이트에서 "유명 쉐프가 감수한 오리지널 벤토! 엄선된 요리를 사용한 요정(料亭)벤토! 카이세키(懐石)벤토! 로스트비프나 규탕, 삼치 등 고급식재를 사용한 벤토! 이 벤토를 럭셔리한 나무용기에 담아 배달합니다"라며 전국 각지 유명 벤토를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가격은 1000엔대 후반에서 3000엔대 후반이다. 

일본인들은 명절·축하·법요·접대·회의·세미나 등 격식 있는 모임이나 행사가 있을 때 십중팔구 벤토를 준비한다. 온천여행을 할 때도 평소 맛보기 어려운 벤토(주로 점심)를 위해 기꺼이 거금을 지출한다. 모두 일반 전문점이나 슈퍼에서 파는 것과 근본이 다른 고급형이다.

'닛코마이조킨' 벤토. 한 세트 16만2000엔. ⓒ Masuzushi 홈페이지

토치기현 닛코(日光)시에 '마이조킨(埋蔵金)'이라는 벤토가 있다. 1일 20개로 한정판매하는 1550엔짜리도 유명하지만, 그보다 상위 등급은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벤토가 아니다. 예약도 극히 짧은 시간만 받는다. 제조사인 '닛코송어회본점(日光鱒鮨本舗)'이 판매일정과 수량을 공지해야만 신청 가능하다. 

이 회사 홈페이지 상품소개항목에 들어가면 '日光埋蔵金弁当'가 나온다. 그리고 각 상품 설명 아래 "1550엔 벤토를 제외하고 매진입니다. 15만엔 벤토는 용기가 만들어지는 대로 판매하겠습니다"라는 어딘지 무성의해 보이는 안내글이 올라있다. 

고가 벤토치고는 이미지 사진도 밝지 않고 다소 투박해 보이기도 한다. 최소한 언제 주문이 가능한지에 대한 안내조치 없다. 전형적 판매자 중심 홍보방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평 없이 기다린다. 

마이조킨 프리미엄 시리즈는 1만엔, 3만엔, 5만엔, 10만엔, 15만엔짜리가 있다. 각각 부가세 8%는 별도다. 이 벤토가 비싼 이유는 내용물을 담는 용기가 수제품인 까닭이다. 닛코보리라는 전통조각 기법으로 장인이 하나하나 수공 제작한다. 

15만엔짜리 내용물을 살펴보면 의외로 단촐하다. 송어스시·홋카이도산 대게·큐슈산새우·와규스테이크·캐비어·어란 등이다. 여느 벤토라면 아무리 높게 잡아도 1만엔이 넘어가지 않을 수준이다. 나머지가 용기 값이란 얘기다. 

이 최상급 벤토의 용기는 하위 시리즈에 비해 너무 작고 소박해 보인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인 입장에서는 선뜻 손이 나가기 어려운 벤토다. 

1990년 설립된 이 회사는 1993년 전국 에키벤 대회에 첫 출전하며 전국에 이름을 알린다. 그 후 1999년 대회를 통해 5만엔 벤토를 처음 선보이는데, 발매 당일 준비된 20개가 모두 매진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마이조킨'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잠시 짚는다. 이 단어의 뜻은 어딘가에 묻혀있는 금은보화를 말한다. 1868년 메이지 정부가 에도막부 본거지인 에도성을 접수했는데 뭔가 들어 있어야 할 금고가 텅 비어 있었다. 

막부가 어딘가에 금은보화를 은닉했을 것으로 판단한 신정부는 대대적인 수색에 나선다. 그 당시부터 온갖 추측과 가설이 난무했지만 현재까지도 그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전부터 닛코도 막부재산 은닉처의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에도막부를 시작한 토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토쇼구(東照宮) 총본산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막부가 무너지고 다시 13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이조킨'이 홀연히 나타난다. 마치 그 옛날 이에야스가 생전에 즐겼음직한 고고한 모습을 하고. 

이 벤토를 보노라면 일본인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이에야스의 역사성과 이미지를 적절히 활용한 벤토 회사의 마케팅전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약공고를 기다린다. 그리고 자기에게 차례가 오면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돈을 지불한다.

장범석 푸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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