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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정의로움의 기저효과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에도 위안 받는 심리적 배경

이수영 기자 | lsy@newsprime.co.kr | 2017.06.28 11:51:25

[프라임경제] 2017년 6월26일 오후, 지역주의와 색깔론으로 덧칠됐던 제3공화국 출범 이후 희대의 흑색선전이 실체를 드러냈다.

지난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최대 도덕적 흠결이었던 '아들 취업특혜 의혹'은 날조였고 핵심 근거라던 제보자 육성과 SNS 메신저 내역은 가짜였다.

의혹 제기부터 공세를 주도했던 국민의당은 이날 당대표가 대국민 사과를 하고 허리를 숙였지만, 창당가치였던 '새 정치'는 존립기반부터 흔들리는 상황이다.

한 누리꾼은 관련기사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만약 문 대통령 당선 안됐으면 조작을 진실로 알고 살았겠지?‘

기자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의 공감을 산 이 한 마디는 권력 앞에 진실과 정의가 짓밟힐 수 있음을 가정한 것이다. 이 가정은 지난 정권의 몰락 과정에서 일부 사실이 확인된 탓에 더욱 섬뜩하다.

가장 최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74.2%를 기록했다. 당선 이튿날 곧바로 청와대에 입성한, 취임 만 50일을 채운 그에게 여전히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사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획기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여전히 지갑은 얇고 체감물가는 고공행진 중이며 일자리를 찾거나 비정규직 꼬리표를 단 채 이리저리 치이는 미생들이 넘친다.

첫 해외순방을 떠난 대통령은 두 달 가까이 전임이 심어 놓은 국무위원들과 동거 중이다. 수천명이 위자료 청구소송을 낼 만큼 공분을 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역시 삼성그룹 핵심 증인들의 노골적인 '진술 거부'에 과정마저 답답하다.

드라마틱한 성과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기대하기 시작했고 위로받기 시작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시민들과 '셀카'를 찍으면서, 피해자를 위해 울고 어깨를 빌려주는 대통령에게 말이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행보가 변화와 파격으로 읽히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점주들에게 재료비 웃돈을 강요한 후 이를 거부하면 일방적인 가맹계약 해지와 보복출점을 강행한 미스터피자에 대해 최근 검찰이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압수수색과 출국금지조치를 당한 정우현 회장은 26일 대중 앞에 울먹이며 용서를 구했다.

지난해 건물관리원을 폭행하고도 무성의한 사과문으로 빈축을 샀던 그가, '갑질' 논란이 불거진 지 2년 만에 여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일방적인 가격인상과 가맹점에 대한 광고비 전가 의혹에 휘말렸던 제너시스BBQ는 공정거래위원회 현장조사 직후 인상 철회를 발표했는가 하면 건설재벌 부영그룹은 위장계열사가 발각돼 이중근 회장이 검찰에 고발됐다.

공정위는 올해 상반기에만 부당거래와 과장광고를 일삼은 불량 프랜차이즈 15곳을 적발했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4배나 높은 성과이며 이미 지난해 연간 적발건수 12건을 넘어서는 수치다.

직장에서 밀려난 중장년층과 구직에 실패한 청년들이 생계형 창업, 그중에서도 피자, 치킨 등 외식 프랜차이즈에 대거 뛰어들었음을 감안하면, 당국이 불량 가맹본사를 강력히 제재하는 것은 상대적 약자인 영세 점주들을 보호하는 안전망이 된다.

구구절절 사례를 늘어놓았지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 사회에 '정의'(正義)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고 여전히 크게 체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보편적인 상식으로 설명 가능한 일이 늘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을 이토록 길게 하는 이유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에도 '기저효과(Base effect)'가 적용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기저효과란 기준이 되는 시점이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현재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에서 주당 5만원짜리 A기업과 500만원인 B기업이 있다. 같은 기간, 똑같이 5만원씩 주가가 뛰었다고 가정했을 때 두 기업 투자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A기업 투자자는 100% 수익률에 눈물이 날 정도겠지만 B회사 주주는 심드렁할 가능성이 크다.

과거 정권에서 자행된 백화점식 비리와 국민 수백명이 눈앞에서 수장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본 사람들은 '이게 나라냐'며 분노했다. 정권에 대한 혐오는 고스란히 새 정부를 향한 기대로 치환돼 당연하지만 상식적인 일에도 위안을 받고 있다.

과거 정치적 수사에 그쳤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진행될수록 강력한 기저효과는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높아진 눈높이와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온전히 새 정부의 몫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성과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 했고 1970년대 저명한 철학자인 존 롤스 하버드대 교수는 '정당화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정의는 아주 당연하고 모든 사회, 모든 구성원이 추구하는 공통된 가치다. 날조와 흑색선전이 통하지 않는 사회. 갑질과 횡포, 부당한 사익을 추구한 이에 대해 가감 없는 응보가 이뤄지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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