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형의 M&M] 부당의 속삭임이 돼버린 낯 뜨거운 존경

2017-08-30 14:26:55

- Aretha Franklin - Respect

[프라임경제] 영웅과 사랑, 서민의 노래(귀족 풍자), 예술과 대중의 조화…. 11세기부터 이어진 프랑스 대중음악 '샹송'의 변천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민요 '아리랑'도 다양한 지역특색은 물론, 한국 근세의 민족사와 사회상까지 반영하고 있죠. 이처럼 음악은 시대상을 반영하거나 때로는 표현의 자유와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투영하기 위한 도구로도 쓰입니다. 'Music & MacGuffin(뮤직 앤 맥거핀)'에서는 음악 안에 숨은 메타포(metaphor)와 그 속에 녹은 최근 경제 및 사회 이슈를 읊조립니다.

존경을 조금 길게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사상 또는 행동 등을 높여 공경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존경은 누군가에게 이상적임을 느꼈을 때 발동되는 순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존경의 실체가 대가를 바라는 입발림이었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존경이 물질적으로 사용될 경우 순수함에는 때가 묻게 되고, 불순해진 감정은 위험한 관계까지 빚어낼 수 있다는 얘긴데요. 

존경은 정치 전략에서 특정 사회집단의 대표자에게 중직을 맡기는 방법으로 그 집단에 경의를 표하는 대신 그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이죠. 만약 여기에 금전적 요소가 결합되면 이 위험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지질 텐데요. 보통 이런 경우를 부당 거래 혹은 불공정 유착이라고 부릅니다.

열네 번째 「M&M」에서 엿들을 노래는 미국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계에서 소울의 여왕으로 불리는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리스팩트(Respect)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편곡이라도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리메이크는 만들기도, 찾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리메이크로 미국 팝 음악 역사상 위대한 예술가 반열에 오른 아티스트가 있는데요. 바로 이번에 소개할 아레사 프랭클린입니다. 
    

▲아레사 프랭클린이 열창하는 모습. ⓒ 구글이미지 캡처


1967년 그는 한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Jerry Wexler)로부터 제안을 받게 됩니다. 2년 전 자신이 프로듀싱한 'Respect'라는 곡을 리메이크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죠. 

당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침체기를 겪고 있었던 프랭클린은 자신의 커리어를 부활시키기 위해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는데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원곡자인 오티스 레딩(Otis Redding) 버전은 R&B의 경계를 넘기지 못하고 팝 싱글차트 35위에 오른 것에 그쳤지만, 프랭클린 버전은 단숨에 팝 싱글차트 정상에 올라 2주 동안 자리를 지키고 R&B 차트에선 8주 동안 1위를 기록했습니다. 

상반된 인기는 감각적인 편곡에 있었는데요. 오리지널 버전도 훌륭하지만, 관악기 소리와 드럼소리가 주를 이루는 데다 기교 넘치는 보컬 때문에 다소 뽕짝 같은 느낌이 

리메이크된 리스팩트는 프랭클린의 파워풀하면서도 나긋한 보컬 G2에서 D6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음역대을 살려 경쾌한 리듬을 감각적으로 살려내는데요. 매력적이면서 여유로운 백그라운드 보컬은 발 박자를 맞추게 만듭니다. 

사실 리메이크 버전의 높은 인기의 이유는 음적 요소 외에 강렬하게 변경된 가사에 있는데요. 프랭클린은 편곡 작업과 동시에 '여자에게 매달리는 가련한 남자의 이야기'를 남성들에게 존중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걸크러시적인 메시지로 바꿔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뭘 원하든 나한테 있죠. 뭐가 필요하든 내가 갖고 있는 거 모르시나요? 내가 원하는 건 오로지 날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에요. (조금만) 헤이, 베이비 (조금만) 당신이 집으로 올 때 (조금만) 이 사람아.

원하는 무언가를 얻고 싶다면 내 집으로 찾아와서 본인에게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줄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를 복종시키기 원하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지만 가사를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가진 돈을 당신에게 다 주려고 해요. 내가 대가로 원하는 건 내 수익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집에 왔을 때 (조금, 조금, 조금, 조금만) 베이비, 그래 (조금, 조금, 조금, 조금만) 집에 왔을 때 (조금만) 그래. (중략) 오, 당신의 키스. 꿀보다 더 달콤해. 알죠? 내 돈도 역시 달콤하다는 걸.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나를 위해. 존중을 갖고 저를 대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중략) 당신이 날 놀리는 것도 이제 끝이에요. (아주 작은 존중을 바라죠) 난 거짓말하지 않아요. 싫다면 그만 두세요. 그럼 내가 사라진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난 받아야겠어요. 약간의 존중 말이에요. 

곡 중 화자는 자신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사랑이든 돈이든 아무것도 얻어 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고하면서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요. 해석한 가사로는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원어 그대로의 가사에는 성적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1967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대규모 흑인 폭동. ⓒ 구글 이미지 캡처


이렇듯 가사 그대로만 본다면 돈 많은 여성이 남자의 존중과 육체적 사랑을 돈으로 사는, 불건전한 거래로 보여지는데요. 사실 이 노래는 1967년 7월 미국의 자동차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흑인과 정부군의 살벌한 대치전 이후 2차전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폭발한 흑인운동가(歌)입니다. 

1964년 뉴욕 할렘, 1965년 로스엔젤레스 와츠 흑인폭동이 일어나면서 흑인음악은 사회의식에 따라 무장된 '소울'로 변화되고 있었는데요. 이런 가운데 1967년 디트로이트까지 이어지면서 흑인 소울의 광풍이 불어닥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프랭클린은 이 노래로 백인들에게 흑인에 대한 존중을 추상적인 뉘앙스로 요구한 것인데요. 이 일로 그는 대중의 전폭적인 호응 1968년 디트로이트 시장 제롬 카바나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날'을 선포하기도을 받으면서 흑인 인권사회 운동의 선두주자, 소울의 대변자로 이미지를 굳히게 됩니다.

불건전한 거래로 보이듯 추상적인 뉘앙스로 흑인의 인권을 요구한 이 훌륭한 노래와는 다르게 최근 우리나라에선 물질적인 것을 얻기 위한 존경을 빙자한, 부당한 속삭임들이 공개됐습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는지요? (…) 죄송스런 부탁이 있어 염치 불구하고 문자 드립니다. (…) 삼성의 협찬+광고 지원액이 (…) 좋은 지면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존경하옵는 장충기 사장님 (…) 제 아들이 삼성전자 ○○부문에 지원을 했는데 (…) 수험번호는 1○○○○○○○ (…) 부족한 자식을 둔 부모의 애끓는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사장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와 은혜를 간절히 앙망하오며 (…) 항상 감사드립니다."

"장 사장님. 늘 감사드립니다. 시절이 수상하니 안팎으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 기업을 지키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갑니다."


지난 8일 공개된 대한민국 유력 언론사 전·현직 간부들과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사장) 사이에 오고간 문자메시지 내용입니다. 국정농단 사건 재판에서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으로 부상한 '장충기 문자'가 공개되면서 동시에 언경유착의 민낯도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죠.

황당한 것은 이 내용이 공개된 이후, 곧바로 관련 기사가 쏟아졌지만, 문자에 거론된 유력 언론사가 작성한 관련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인데요. 주류 언론의 보도가 없으니 뜨겁게 달궈질 것 같았던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사이트도 잠잠했죠. 

심지어 일부 언론사에 의해 남아있던 기사(장충기 문자 관련)에는 삼성의 미담 기사가 덧칠되기 바빴습니다. 이달 8일 '장충기 문자 내용' 기사가 보도된 이후 포털에서 정체된 삼성 연관 기사는 10일, 삼성전자의 인도 사회공헌 기사가 줄을 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지난 2월에 이미 보도된 내용이었는데도 말이죠. 

▲유력 언론사 전·현직 간부들과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차장 사이에 은밀한 문자가 오갔다. ⓒ JTBC 방송 캡처


누리꾼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들은 주머니에 돈만 들어오면 언론의 자유는커녕 국민의 알권리 같은 것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날선 비판을 던지지만, 정작 저격된 언론사들은 이에 대한 일말의 입장표명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선 누리꾼의 비판처럼 국민들은 이미 언론에 대해 확고한 불신을 갖고 강하게 규탄합니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침묵과 뻔뻔함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공개된 문자 내용처럼 부당한 거래가 사실이기 때문이겠죠. 

안타깝지만 이런 모습은 이번에 거론된 언론사들의 모습만이 아닙니다. 최근, 어쩌면 오래된 일이겠지만, 대기업 광고에 목을 매는 모습은 모든 언론들 스스로가 불현 듯 발견한 자신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수록 힘들어지는 언론환경을 핑계 삼아 현실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내세워 부정한 행위를 합리화한다면, 언론이 더 이상 사회의 정의를 대변하는 단체가 아닌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겠죠. 

배만 부르게 해준다면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는 머슴처럼 말입니다. 

이윤형 기자 lyh@newspri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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