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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구형의 황야' 동지에게 돌 던진 윤영찬 수석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7.09.20 17:06:47

[프라임경제] 마츠모토 세이초는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을 넘나들며 많은 작품을 남겨 사후에도 일본 국민작가로 추앙받는다. 그의 작품 중에 2차 대전 무렵의 일본사와 추리기법을 버무린 '구형의 황야'라는 것이 있다. 

어느 유럽 중립국에 근무하던 장년의 일본 외교관이 2차 대전 종전 무렵, 연합국과의 막후 협상을 이끌어낸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이 협상 타결로 그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실제 역사적 결과보다 일본에 덜 가혹한 종전 조건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외교관은 현지에서 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돼 모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일본이 대단히 어지러운 정세와 분열을 겪은 까닭이다. 육군과 해군 간 세계 정세 판단 가치관의 대립은 물론이고, 전쟁에 패색이 짙어질 무렵에는 외교적 종전 의견도 일부에서 개진됐으나 군부 강경파에 밀려 득세하지 못하는 등 치열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

일본에 유리한 강화 조건을 성사시키면서도 결국 역적으로 몰릴 게 우려돼 죽은 사람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종전 이후 약 20년이 흐른 무렵, 이 외교관이 남긴 딸이 어느새 장성한다. 이 딸과 결혼하게 될 젊은 기자가 이 길고 비밀스러운 사연을 다시 조사한다는 줄거리다. 이 긴 세월 이 외교관의 마음은 얼마나 황량했을까. 그래서 그가 지구 어디로 발걸음을 옮기든 황무지 같은 마음일 것이라 해서 제목도 구형의 황야다.

전쟁 시기 일본 내부 갈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번에 이 '구형의 황야'를 연상케 하는 정책적 의견 대립과 갈등이 우리나라 최고위층 내부에서도 터져나온 사례를 하나 보게 됐다.

19일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청와대는 송영무 장관의 국회 국방위원회 발언과 관련, 국무위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조율되지 않은 발언으로 정책적 혼선을 야기한 점을 들어 엄중 주의 조치했다"고 밝혔다. 일명 '문정인 교수 강력비판론'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의 조치에 대해 야당 정치인의 비판이 날카롭다.

20일 오전 최명길 국민의당 최고위원은 "대통령께서 해외로 떠난 청와대의 수석들이 국방부장관을 모독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규정했다. 그는 사실상 발표 명의자인 윤 수석을 집중겨냥해 '차관급 수석이 국무위원의 국회 출석 답변 내용을 두고 정책적 혼선을 야기한 점을 들어 엄중 주의 조치했다고 발표한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최 최고위원은 "법 조항 어디를 봐도 청와대 수석이 행정부 책임자인 장관의 행위에 대해 주의조치를 할 근거가 없다"고 전제한 후 "해당 수석은 언론의 지적이 계속되니 비서실장과 국가안보실장이 논의하고 결정한 일이라고 해명했는데, 정부조직법 어디를 봐도 비서실장이나 안보실장이 국무위원의 행위 시정을 요구할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부조직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고 군과 국방부를 지휘하는 국방부장관의 권위를 박탈한 심각한 일탈"이라고 제언했다.

사정의 전체적 그림이 실제로 이렇다면, 윤 수석 등 이런 발표를 하게 된 정황 라인에 선 이들은 위법 논란은 둘째치고 자중지란의 극치를 보였다는 점에서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반대 의견을 거칠게 드러낸 송 장관도 문제지만, 문제의 종합판은 결국 청와대 쪽(국민의당 관점에 의하면 특히 윤 수석)이다. 차원이 다른 문제를 빚은 셈이다. 경고 메시지 자체를 기자들에게 공표할 때 '청와대는'이라고 주어를 넣는 것은 '호가호위 우려'도 살 수 있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에 없는 상황이다. 재가를 얻어 대통령의 뜻을 정확하게, 정중하되 단호하게 정제된 언어로 비공개 전달하거나 혹은 대외적 발표를 했어야 야당에서 이런 지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차관급이 장관을 욕보인 게 아니냐'는 관점에서만 의혹을 가질 건 아니다. 엄혹한 북핵 논란을 헤쳐가는 와중에, 지도자급 인사들이 서로 뜻이 다르다고 해서 돌을 던진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긁어대는 것도 모자라 권한 이상의 칼까지 뽑아 겨눴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거칠기만 한 외교 지형, 끝없이 둥근 지구를 걷듯 끝없는 과제를 막막한 마음으로 풀고 있는 이들끼리 서로 일정한 예의, 격식은 갖춰야 한다고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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