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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해부] 현대중공업그룹 ①태동과 성장…정주영 신화의 전성기

3세 경영 앞두고 '덜어내기 삼매경' 위기극복 가능성은?

전혜인 기자 | jhi@newsprime.co.kr | 2017.11.24 14:09:28

[프라임경제] 국내 대기업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세계적 기업일지라도 변화의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선택'과 '집중'을 요구받고 있다. 국내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대기업들의 '선택'과 '집중'을 파악해보는 특별기획 [기업해부] 이번 회에는 현대중공업그룹에 대해 살펴본다.

ⓒ 현대중공업

한국 조선업이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도 현대중공업(009540)은 '효자'였다. 3분기 매출 3조8044억원, 영업이익 935억원을 거둬 올해 누적 영업이익만 4000억원대를 유지했다. 작년까지 알짜 자회사로 역할을 톡톡히 했던 현대오일뱅크를 현대로보틱스(267250)에 넘겨주고도 흑자행진을 유지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다만 현대중공업을 둘러싼 상황은 여전히 불친절하다. 당장 일감이 없는 상황에서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 극심한 보릿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반대로 보면 현대중공업의 인적분할과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좋은 구실이다.

◆'한국 조선의 상징'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정주영 신화'의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는 현대중공업은 지난 1972년 3월23일, 울산 미포만 백사장에서 역사의 서막을 알렸다. 각국 대사와 시민 5000여명이 운집할 정도로 거창했던 울산조선소 기공식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조선업 진출의 출사표를 던졌다. 

당시 국내 조선업 수준은 열악했다. 최대 건조 선박은 대한조선공사가 건조한 1만7000톤급이 유일했고 건조능력은 19만톤에 불과했다. 세계 점유율은 1%에도 못 미쳤다. 현대중공업을 향해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것은 당연했다.

현대는 당초 미쓰미시 등 일본기업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만만찮은 견제에 합작이 무산됐고, 결국 차관 도입을 통한 독자적인 조선소 건설로 노선을 틀었다. 

한 고위 공직자는 '현대가 조선사업을 성공하면 내가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로 올라가겠다'고 비아냥댔다. 차관을 끌어오기 위해 외국을 도는 정 명예회장에게 '목선이나 만들라'는 놀림이 쏟아진 상황에서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지도 한 장과 5만분의 1 지도 한 장, 그리고 26만톤짜리 유조선 도면 한 장만을 갖고 영국 버클레이 은행과 수출신용보증국, 그리고 해외 선주들을 차례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날 세계 조선사상 전례가 없는 최단공기 내 최소비용으로 초대형 조선소와 2척의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사업계획을 선언했다. 

'우리나라 공업 발전과정에 획기적인 이 대사업은 초창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는 근면과 노력으로 정부와 국민의 협력을 얻어 본 사업을 필히 성취시키겠다'는 각오도 다졌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 조선사업부 전경. ⓒ 현대중공업

허무맹랑해 보였던 모험은 2년 만인 1974년 6월28일 울산중공업 준공식 겸 1·2호식 명명식이 국가적인 행사로 전개되며 현실이 됐다.

현대중공업의 제1호 고객사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의 리바노스 회장은 "지금까지 내가 본 배 중에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는 찬사로 현대중공업의 세계무대 데뷔를 축하했다.

◆도전과 개척 무기로 무서운 확장

한국 조선업은 1993년 처음으로 일본을 누르고 수주량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전, 현대중공업은 국가보다 먼저 1위 타이틀을 거머쥔 바 있다. 일본 경제주간지 '다이아몬드'는 1985년 특집호에서 1983년 건조량을 기준 삼아 현대중공업을 조선 부문 세계 1위 기업으로 선정했다. 조선소 기공식 이후 11년, 선박건조 시업식 이후 겨우 10년만에 이룬 성과다.

물론 쉽지 않은 풍파도 있었다. 사업 시작 직후인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 오일쇼크 위기를 맞으면서 세계 해운·조선경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고 현대중공업 역시 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현대중공업의 선택은 투자확대였다. 1975년 수리조선소인 현대미포조선(010620)을 세웠고 그해 각종 육·해상 선박용 엔진 생산을 위한 엔진기계 사업본부도 발족했다. 2차 오일쇼크 때는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에서 '현대중공업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꿨고 해양개발사업부 등을 신설해 본격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조선업 경기가 정점을 찍었던 1993년에는 △현대중전기 △현대중장비 △현대로봇 △현대철탑 등 4개 계열사를 합병했는데 역시 조선분야 비중을 점차 낮춰 선제적으로 경기에 대응하는 종합중공업 체제를 갖췄다.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2002년 2월 현대그룹과 계열 분리해 현대중공업그룹으로 홀로선 것이다. 그해 5월 위탁경영 중이던 삼호중공업을 인수하고 2008년 하이투자증권과 하이자산운용, 이듬해 현대종합상사를 그룹 일원으로 삼으면서 종합중화학그룹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이밖에 국내 최초의 LNG선, FPSO 수출과 선박용 대형엔진 생산 누계 1억마력 돌파(2010년), 세계 최초 선박 인도 1억톤(GT) 달성(2012년) 등 새로운 이정표도 꾸준히 세웠다. 세계적으로 조선업 경기가 냉각기였던 2015년에도 세계에서 처음 선박 2000척을 인도해 유럽과 일본 업체들을 간단히 따돌린 것도 현대중공업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꾼 과거, '덜어내기' 먹힐까

위기를 늘 기회로 삼았던 현대중공업은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헤쳐갈지도 국가적 관심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양플랜트 저가수주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불어난 누적손실로 회사는 2014년 3조원대 적자를 냈다. 이듬해 1조6000억원의 적자를 더 떠안았고 수주 규모는 호황기 대비 10분의 1토막으로 쪼그라든 상황이다.

과거 위기 속 공격적 사업확장이 현대중공업의 필살기였다면 오늘날의 위기극복 키워드는 '덜어내기'다.

지난 4월 인적분할에 의한 독립법인 체제 구축 후 현대중공업 임직원들은 울산 현대중공업 본관 앞에서 기념식수를 진행했다. ⓒ 현대중공업

6개 독립법인 체제로 변신한 현대중공업은 작년 말 친환경에너지(현대중공업그린에너지) 및 서비스(현대글로벌서비스) 부문을 물적분할해 자회사로 편입시켰다. 올해 4월에는 △조선·해양·엔진(현대중공업) △전기전자(현대일렉트릭앤에너지시스템·267260) △건설장비(현대건설기계·267270) △로봇(현대로보틱스) 총 4개 회사로 인적분할을 마쳤다.

사업재편을 통한 비효율 절감, 사업부문 전문성 강화를 내세우면서 현대로보틱스를 지주사로 앞세워 순환출자 고리도 상당 부분 끊었고 독립경영 체제 확립에 따른 효율성 향상에 안간힘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최근까지 △호텔현대 지분 매각(현대중공업) △현대로보틱스 지분 매각(현대미포조선) △프리 IPO(현대삼호중공업) 등 경영개선계획을 이행 중인데, 이 결과 현대중공업의 연결기준 부채비율은 지난 분기 대비 160.1%에서 144.2%, 차입금비율은 68.9%에서 57.9%로 낮아졌다. 

다만 인력감축 중심의 물리적 구조조정으로는 경쟁력 강화에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진단도 적지 않다, 최근 중국 업체에 연이어 수주 실적을 가로채기 당한 원인이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졌기 때문임을 감안하면 기술 상향평준화 시대에 새로운 해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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