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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필 황무지' 전략 연상케 한 靑의 '5당 회동 대처법'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8.03.07 16:26:02

[프라임경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피워 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네. -T.S.엘리엇, '황무지' 중 일부

하고 싶은 말이나 분위기 전달은 일정 부분 다 하고, 명분을 챙기면서 상대방의 까다로운 반격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방식의 화법이 있다면 정치적으로 유용성이 클 것이다.

청와대는 7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대표 초청 오찬을 추진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간 발언들이 배석했던 각당 관계자들의 입을 통해 알려지면서 문 대통령의 답변 흐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청와대의 치밀한 준비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풀이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특히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공격에 시달릴 가능성 등이 일찍이 예견된 바 있었다. 홍 대표는 이번 5당 초청 회동의 주요 이유인 방북 특별사절단 결과에 대해 히틀러의 야욕에 말려들어 결국 휴짓조각이 된 뮌헨회담 체결을 언급·비유한 바 있었다. 또 다른 정당들 역시 안보 시각 등 정치적 입장이 달라 첨예한 갈등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대체로 문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 이번 회동의 성과가 아직 미완성이지만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앞으로의 협력 당부의 명분을 확고히 쌓는 흐름에서 리드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의 전언처럼 이번 회동에서 언쟁은 일부 있었다. 홍 대표가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북한의 (핵무기 완성) 시간벌용 회담으로 판명난다면 국민들과 대한민국은 정말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고 양보없는 공세를 찔러넣은 것.

하지만 신용현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이나 이용주 민주평화당 원내대변인 발언을 종합하면, 문 대통령은 일명 '안보보수층'의 가장 불만이자 우려 사안들을 잘 짚었다. 그는 "남북대화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제재 압박이 이완되는 것은 없으며, 선물을 주거나 하는 것도 없다"거나 "특별히 정상회담과 대화를 위해 제재를 완화할 계획이 없다"고 강조하는 등 지뢰들을 잘 제거했다.

더욱이 모두발언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직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하는 등 지나친 공세가 반복될 가능성을 제거하는 화기애애한 기류 조성에도 신경을 쓴 것으로 분석된다.

압권은 일종의 아킬레스건인 '문정인 교수 건'에 대해서도 선방한 대목이다. 외교·안보특보인 그가 종종 문제 발언을 해 청와대에 부담을 주는 상황에 대해서도 "한미 동맹 관계를 건강하게 한다"는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을 써 '시적' 답변을 했다.

이런 문 대통령 화법은 과거 정치권에서 명대변인 중 하나로 활약했던 유종필 전 민주당 대변인(이후 지방자치단체로 눈을 돌려 현 서울 관악구청장)의 '황무지 인용 브리핑'을 연상케 한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 노무현 대통령후보 공보특보 등 여러 번 중요 국면에서 '입' 역할을 했다. 그는 고교 시절 즐겨 암송하던 시를 이후에도 기억하고 잘 활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과거 중요한 협력 가능성이 예고된 사안인데, 아직 명확한 줄거리는 없는, 그래서 기자들의 추가 취재를 막으면서도 분위기를 잘 전달할 방법'으로 시를 읊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살려 톡톡한 재미를 본 적도 있다. 

문 대통령이 안보보수들의 가장 큰 우려 사항들에 대해 잘 짚어주면서도 필요 이상의 논쟁이나 끝없는 안보검증으로 흐르지 않은 데에는 전체 맥락을 4월말 열릴 북측과의 정상회담 등에 대한 희망적인 시각으로 잘 갈무리하고 언어화한 '답변 구조의 미학'에도 일정 부분 덕이 있어 보인다. 마치 '4월은 잔인한 달, 기억과 열망(유 구청장은 원문의 욕망 대신 다른 단어를 일부러 사용했다고 한다)'으로 흐르면서 희망섞인 앞날을 제시했던 유 구청장의 황무지 브리핑과 유사한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도 이번 5당 회동의 선방을 계기로 한반도 정세라는 황무지에서 모종의 새 봄을 싹틔울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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