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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뉴스]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를 정하고 전시회를 열어요

 

김성훈 기자 | ksh@newsprime.co.kr | 2018.04.30 17:28:16

일본에 의해 지배를 당했던 시절,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윤현진씨 모습이에요. ⓒ 독립기념관

[프라임경제]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이 국가를 위해 공을 세웠던 사람이나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단체인 국가보훈처와 함께 독립운동가 윤현진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정하고 나라를 위한 일을 하는데 들인 노력과 수고에 고마움을 표하는 전시회를 열었어요.

윤현진은 경상남도 양상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고, 서양에서 들어온 새 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포 구명학교에 들어갔어요.

1909년에는 중국을 둘러보며 나라의 독립에 뜻을 품은 독립지사들과 만나 잘 짜여진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일본 유학을 가기고 마음을 굳게 정하였어요.

1914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들어가서 외국에서 공부를 하는 우리나라 사람 모임인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어요.

이후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모임인 신아동맹단에 들어가 여러사람을 모으고 그 앞에서 말을 하고, 책을 나눠주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을 반대하는 운동을 계획하여 시작했어요.

1916년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등 여러단체들과 관계를 맺고서 나라를 위해 열심히 활동했어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다음에 바로 중국 상하이로 몸을 피하여 임시정부에서 내부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뽑혔고, 임시정부에서 의견을 정하는 회의에서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하였어요.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만들고, '독립신문'을 만들기 위해 발기인 등을 맡았어요. 발기인은 앞장서서 어떤 일을 할 것을 주장하고 그 방안을 마련하는 사람을 말해요.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대한 책임을 지는 재무차장으로 뽑혀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게 되었어요.

임시정부에서 차장급 사람들을 대표하던 윤현진은 의견이 서로 반대되어 있는 상황에도 임시정부를 새롭게 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어요.

1921년 9월 독립운동에 온몸과 정신을 다해 노력했던 윤현진은 29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어요. 대한민국 정부는 윤현진의 노력과 공을 기리기 위해 1962년 나라를 세웠던 공을 인정한 상장을 주었어요.




'우리 모두 소중해' 자원봉사 편집위원

김재혁(태릉고등학교 / 3학년/ 19세 / 서울)
김희은(풍무고등학교 / 3학년 / 19세 / 경기도)
이고은(상명대학교 / 1학년 / 20세 / 서울)



'우리 모두 소중해' 감수위원

송창진(휴먼에이드포스트 기자 / 23세 /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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