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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회주의 ④] 이승만·DJ·朴, 반쪽 의회주의자의 시대?

대통령 집중된 권력지형상 의회는 항상 거수기 인식 한계

홍수지 기자 | ewha1susie@newsprime.co.kr | 2018.06.26 18:20:48
[프라임경제] "사적 친분이 없지만 뜻이 같으면 동지(同志)다. 민주사회에서 정치는 친분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친소관계가 아니라 뜻을 함께 하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고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자는 '김부선 논란' 성명서에서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여와 야를 떠난 국정 협의, 심지어 같은 당 안에서도 동지를 찾기가 어려운 시대다. 공론화의 장, 의회의 몫은 어디에 있나?

1948년 5월31일, 우리나라 제헌국회가 업무를 개시했다. 제헌국회 개원일 오전 회의에서 임시의장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됐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독립운동가로 이미 너무 유명했기에 의장 경력이 상대적으로 가려지는 데다, 훗날 대통령이 됐다는 점 그리고 한국전쟁과 4.19 등 많은 영욕의 순간을 거쳤다는 점에서 이 경력은 별반 조명이 되지 않기 때문.

하지만 그의 이날 연설은 뭉클한 구석이 있다. "국회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이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며 이 박사도 감동을 표했던 것.

이렇게 우리의 정치사와 의회주의는 '대통령병'이 강했던 인물이 국회를 이끄는 것으로 단추를 끼우는 비정상적 융합 구도를 줄곧 보이게 된다.   

◆'유진오 헌법안' 꺾은 인물이 첫 의장 아이러니

미 군정청이 파악한 바와 같이,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은 대통령 중심제와 반공 민주주의를 대단히 신봉하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이런 성격은 정통 대통령제에 대한 이해와 선호가 아닌 제왕적 대통령제 더 나아가서는 사실 왕조의 부활과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생각한 게 아니었는지 정도의 우려섞인 해석마저 낳고 있다.

실제로 그는 유진오 박사 등 전문가들이 당시 여론을 집대성, 일부 개인 의견을 가미해 만든 헌법 초안이 의원내각제 속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였고 결국 대통령제 국가로 한국 정치가 발걸음을 딛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첫 지지기반이 되어 준 한민당에 대해서도 100% 만족하지 않고 결국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며, 이후에도 사사오입 개헌 등 기회가 닿을 때마다 권력 강화를 추구했다.

1987년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유세에서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4.19로 등장한 장면 내각은 의원내각제 장점을 잘 발휘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장 총리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국론 분열을 의회주의라는 필터로 잘 걸러내고 정책을 집행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쿠데타를 제때 진압하지도 못했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 등 정치인들이 군사정부의 권위주의 정치에 맞서고자 노력했다. 이들의 유력한 발언 기회와 무대는 바로 국회였다. DJ를 영원한 의회주의자로 평가하는 등 이들이 의원으로서, 의회 구성원으로서 활약한 족적은 대단히 크다.

이들이 중심이 돼 합종연횡했던 일명 '3김시대'만 해도 의회정치를 어떻게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인식은 있었다. 물론 얼마 전 서거한 김종필 전 총리의 경우 의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논란이 크므로 아예 제외하더라도, YS나 DJ는 인생의 절대적 부분을 의원으로 살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3김도 한계 명확, 그래도 그 낭만마저 사라지니…

하지만 이들은 결국 반독재 투쟁을 한다는 명분 때문에 의회 활동 기간 전반을 의회주의자로서 오롯히 살았다기 보다는, 예비 대통령으로서 대통령 준비의 장소로만 의회를 바라보았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아예 이들 3김시대가 후반부로 가면서, 다양한 정치 이념이 등장하고 스펙트럼이 다양해진 점을 의회라는 틀에서 기성 정치인들이 잘 처리하지 못하면서 대결과 정쟁의 무대로 의회가 인식되는 퇴보 현상마저 빚어졌다. 

정치학자로서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인연을 맺고 활동해 온 이내영 국회입법조사처장은 이 같은 정치 문화에 대해 의미있는 분석을 제시했다. 그는 우리 정치의 대결·갈등 고착화의 문화가 약 15년 전부터 특히 구조화했다고 한 언론과의 대담에서 짚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 뉴스1

이 처장은 2002년 대선 즈음부터 정당 간 이념적 거리가 커졌고, 2004년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과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 등으로 정치 양극화가 심화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적대적 정치 문화는 훨씬 더 구조화했는데 협상과 타협, 상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치 문화나 리더십은 사라졌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지금은 탄핵으로 불명예 퇴진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대단히 긴 시간을 의원실에서 보냈다. 하지만 그조차도 국회의원들이 정부의 업무에 방해를 하거나 반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권위주의적 행정부 우위 사상을 보였다. 

정부의 시행령을 마음대로 고치지 못하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을 추진한 것을 두고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을 극렬하게 몰아세웠고, 이때의 갈등이 결국 이후 레임덕의 한 단초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건전하고 일리있는 의회의 견제 필요성을 염두에 두지 않거나 의회의 중요성을 청와대 대비 상당히 아래에 두는 정치 지도자들이 줄곧 득세하면 굳어진 기류를 여의도에서 완전히 걷어내지 못하면 후진적 정국 불안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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