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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평범한 직장인"…워라밸? 눈칫밥에 서러운 은행원

주52시간? 점심시간 보장부터…먹통 직원 복지적 제도, 혜택 대신 고객불만으로 돌아와 '한숨'

이윤형 기자 | lyh@newsprime.co.kr | 2018.08.23 16:10:00

작동도 안되는 근무환경 개선제도에 은행원들이 고연봉에도 호사까지 누린다는 오해를 받고 있다. ⓒ 뉴스1


[프라임경제] #. 입사 2년차 은행원 최정현씨(가명·30)는 점심시간 때만 되면 몰려드는 고객들의 업무처리를 위해 매일 교대식사를 한다. 먼저 나오든 뒤늦게 나오든 점심시간 이후에 주어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식사시간은 고작 30분 정도인 데다 교대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바쁜 날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오기도 한다. 평소 느긋한 식사 습관을 갖고 있던 최 씨는 없던 위장병까지 얻었지만, 며칠 전에는 20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헐레벌떡 들어오는데 객장에서 '바빠 죽겠는데 무슨 은행이 점심시간에 자리를 비워'라는 짜증 섞인 목소리까지 들었다. 

#. 올해 초 입사한 신입 은행원 박승윤씨(가명·29)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민원고객과 진상고객 탓에 매일 저녁, 술로 쓰린 속을 달랜다. 요즘에는 온라인뱅킹을 이용에 불만을 느끼고 창구를 찾는 은행들이 부쩍 늘었다. 은행 시스템 문제가 아닌 휴대전화 단말기 결함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도, 무작정 문제를 해결하라며, 그렇지 않으면 '불친절·무응대'를 빌미 삼아 '금감원에 민원을 올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다. 속상한 마음에 박 씨는 주변 지인들에게 고민을 털어 놓지만 '그만한 연봉에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이라면 그 정도는 참아야지'라는 냉소 섞인 무관심만 돌아올 뿐이다. 

최근 한국사회에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시되면서 은행권에도 '저녁(휴식)이 있는 삶'을 표방한 각종 근무 환경 개선 제도들이 운영되는 등 워라밸(Work-Life Balance) 실천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일각에서는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은행의 업무환경이 더 윤택해지고 있다는 부러움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일선 현장 은행원들의 반응은 사뭇 다르다. 

현재 시중은행들은 이미 전 은행 공통으로 일정 시간이 되면 업무용 PC가 자동으로 종료되는 'PC오프제도'와 업무 시간을 개인의 편의에 맞게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를 운영하고 있다.

또 일부 은행들은 '가정의 날'을 지정하는 등 정시퇴근 유도나 일시 단축 근무로 '초등학생 자녀 돌봄 제도' 등으로 직원들의 귀가를 독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은행권에는 내년 하반기로 미뤄진 '주 52시간' 법정 근로시간이 은행 내부적으로는 이미 도입됐다고 보고 있지만, 이는 은행 밖의 시선이라는 게 현장 근무자들의 목소리다. 

입사 2년차 최 씨는 "PC오프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업무차단을 풀 수 있는 유명무실한 시스템"이라며 "은행의 진짜 업무는 영업점 셔터를 내린 오후 4시부터인데다 점심도 교대로 먹는 마당에 업무용 PC가 꺼질 틈이 어디 있겠냐"고 씁쓸함을 전했다. 

쉴 틈없이 붐비는 객장 탓에 은행원들은 점심도 거르는 날도 허다하다. ⓒ 뉴스1



통상적으로 은행 창구는 영업점 문을 닫은 오후 4시,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상품 가입 서류에 틀린 게 없는지를 살피고 업무 보고서를 작성하는 추가업무가 끝날 즈음이면 일반적인 퇴근시간을 훌쩍 넘긴 날이 부지기수다. 

제도를 애초에 활용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사측의 교묘한 훼방도 감지된다. 일부 시중은행에서는 PC를 꺼둔 채 오전 이른 시간부터 회의를 잡거나, 교육일정을 일과에 포함시킨다는 제보가 노조에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게 은행 내부의 주장이다.

PC가 꺼진다고 업무가 종료되는 것도 아니다. 개인 메신저와 전화 등 업무 연락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추가 업무지시에 야근 결재 받기도 쉽지 않다는 불만도 나온다. 일부 지점장들은 PC오프제와 업무종료를 들먹이며 야근 승인을 반려해 오히려 시간 외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연근무제도 마찬가지다. 낮 12시 출근인 직원에게 오전 회의에 참석하라고 강제하고, 오전반 직원이 휴가를 가면 오후반 직원에게 오전 일까지 맡기는 일이 관행처럼 자리 잡혔다는 게 일부 은행원들의 목소리다. 

이런 상황인데도 은행원들은 제대로 된 처우는커녕 고충을 이해 받기 위해서는 사회적 장벽까지 넘어서야하는 게 현실이다. 은행원들의 여가에는 은행 업무를 보는 일반 직장인들에게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취업포털 인크루트와 시장조사기관 두잇서베이가 성인남녀 2896명을 대상으로 '은행 점심시간 보장'과 관련한 설문조사는 객장의 인식을 잘 드러낸다.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들의 과반수는 평일 오프라인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회사 점심시간(69.8%)을 가장 많이 활용했고, 전체의 54.7%는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반차·연차를 쓴 적이 있다'고도 답했다. 오후 4시에 문을 닫는 은행에 퇴근시간인 6시 이후에는 방문하지 못하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은행원들도 다른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점심시간에는 업무를 쉬어야 한다'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 응답자 비율은 40.8%를 차지했다. 또 '은행원들의 점심시간 1시간 보장'에 대해서는 '반대한다(37.2%)'가 높은 비율을 기록했다. 

은행원의 점심시간 보장과 이를 포함한 근무시간 단축에 대한 일반인들의 개인적인 의견도 은행원들에게 비수로 날아든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SNS나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앱)에 고민을 올려 봐도 '고연봉 직업이면 참고 견뎌라' '더 힘든 직업이 많은데 배부른 소리한다' 같은 반응이 대부분이라 이제는 고민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겠다"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높은 연봉에 대가라는 등식은 도대체 누가 성립시켰을까 하는 한숨만 나온다"고 토로했다. 

인터넷·모바일뱅킹 등 비대면 채널 확대로 어플리케이션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고객과 함게 민원고객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 뉴스1



일반 업무만으로도 시간에 쫓기는데 은행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진상 고객들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신입 행원 박 씨는 "(인터넷·모바일뱅킹)서비스가 불편하다고 찾아오는 고객들부터, 창구는 왜 비어있고, 업무처리는 또 왜 그렇게 느리냐는 고객도 모자라 이제는 실내온도까지 트집 잡는 분들도 계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날이 갈수록 민원(진상)고객들이 늘어나 이제는 얼굴 붉히는 고객이 없으면 하루 일과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까지 받는다"고 멋쩍게 웃으면서도 "말장난으로 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신 치료를 받거나 퇴사를 고민하는 동기들도 여럿 봤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민원 고객이 늘어난 데에는 최근 은행들의 비대면 채널에 치중한 영업점 운영 형태 변화가 한 몫 했다는 시선도 나온다. 

핀테크와 비대면 금융 확대에 따른 은행의 인력 감축이 창구 순환율을 떨어뜨렸고, 은행원의 1인당 업무량이 늘어나면서 고객의 대기시간이 자연스럽게 길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기존에는 일반 은행 업무로 영업점에 방문 했다면, 최근에는 비대면 채널 이용에 따른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찾아오는 고객도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민원고객이 체감적으로도 실제로도 늘어나고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워라밸을 실천하기 위한 국내 은행들의 복지적 근무환경 개선 제도는 표면적으로는 은행들의 혜택으로 비춰지지만 결과적으로 부담과 스트레스로만 작용되고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은행권이 주 52시간 도입에 앞서 근무환경과 관련된 다양한 제도들을 시도, 운영하고 있지만 사내 관행들로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은행들이 마련한 직원 복지적 근무제도가 고객의 불편을 초래하고, 민원으로 번져 직원들에게 돌아가는 꼴"이라며 "지금이야 자발적 조기도입을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52시간제가) 법적으로 정식 도입됐을 때 이런 불협화음은 큰 문제로 다가 올 수밖에 없어 지금부터 수정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물론, 은행원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적 혹은 노사(勞事)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은행을 이용하는 일반 직장인 고객들의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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