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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해저터널 논의와 기업가의 대의

거국적 관점에서, 상황 변화 따라 소신 접는 것도 덕목…박흥식 日 어선 수입 망언과 대조할 만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18.10.10 16:40:45

[프라임경제] 박흥식 전 화신백화점 회장은 친일파로 잘 알려져 있지만, 광복 이후에도 활발한 경제적 활동을 계속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구속된 바 있으나, 한국전쟁 이후에도 흥한방적을 설립하는 등 경제인으로서의 생명을 이어나갔다. 

이승만 정권에서만 잘 나간 게 아니다. 4월 혁명으로 장면 정부가 들어섰을 때에도 그의 위치는 대단히 탄탄했다. 아울러 그 다음 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도, 그는 추락하거나 단죄되기는 커녕 오히려 군사정권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는 등 계속 승승장구했다.

그런 그의 행보를 두고 우리가 친일 경제인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다거나, 역대 정부가 경제계와 결탁한 증거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가치중립적으로 평가하자면, 그의 사업적 감각이 대단히 뛰어났고 매번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거의 유일하게 뜻대로 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는 무렵에 일본 자본과 손잡고 수산업 재건을 해보려 한 일이다. 

금년 9월에 나온 책 '한국역사 속의 기업가'에서, 방문철 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한 일화를 소개했다. 방 교수에 따르면, 박흥식은 전란 중에 일본 도쿠시마수산회사와 손잡고 600여척의 어선을 수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일파에 관대했다는 비판을 듣는 이승만 정권으로서도 이 구상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일본에 우리나라 수산업이 통째로 일본에 종속될 수 있다고 정부에서 강력히 반대했다는 것. 결국 이 사업은 미완성의 계획으로 남았다고 한다.

이를 보면서 '그래도 이승만이 완전히 총기가 흐려지진 않았었구나' 생각해 보게 되고, 박흥식이 왜 큰 기업인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두고두고 친일 기업인의 표본으로만 남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박흥식 외에도 많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출발점에서 보면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들은 정경 유착까지는 했을망정, 광복 이후에는 국익에 기여한다는 일정한 사업보국 논리의 자기 검열망은 가졌던 듯 싶다. 그런데 친일에 부의 뿌리를 둔 것도 모자라, 광복 이후에도 또다시 국가 산업의 주요한 부분을 다시 일본의 지배력 밑으로 넘길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을 선뜻 사익 때문에 구상했다는 논란을 박흥식은 빚었던 것이다. 이른바 박흥식 기업문화의 본질적 한계를 극명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아마 사고방식에 일정한 브레이크가 있었더라면, 혹은 다른 방향으로 그런 열정을 유도할 수 있는 전환키가 있었더라면 오늘날 유수의 대기업집단 못지 않게 '박흥식 제국'이 국익에 기여하며 여태껏 생명력을 갖고 국민적으로 칭송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업인의 감각과 소신이 무한정 자유롭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보장해줘야 할지 혹은 그 한계선이 있어야 할지 혹은 그걸 자신이 찾을지 혹은 누군가 그어줘야 할지 되짚어보기에 적당한 사례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문제 생각을 하게 되는 예가 비슷한 시기에 하나 더 있었다.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논의가 9월 한 심포지엄에서 새삼 조명되면서 경제계의 과거 입장도 다시 시선을 모으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보면, 과거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등 경제인 일부가 한일 해저터널에 긍정적 거론을 한 바 있으나, 현재 그런 논의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 것 같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는 박 회장의 과거(2008년, 2014년) 한일 해저터널 등 발언과 현재 입장을 확인하는 질문에 과거 그런 발언이 있었다는 정도 외엔 (최근) 아는 바가 없다고만 답했다. 

경제계에서 이런 해저터널 문제에 군불을 지피기보다는 국익 차원에서 더 큰 관점에서 논의를 한꺼번에 하는 게 옳다는 신중론으로 선회하거나 사실상 뜻을 접은 것으로 풀이된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유야무야'됐다고 정리하거나, 일종의 기회주의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할지도 모르겠으나, 이런 선택도 오히려 큰 용기라고 생각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일 해저터널을 단일 아이템으로만 놓고 계산기를 두드리면 족했다. 하지만 불과 몇년만에 상황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일명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이야기해야 하는 새 국면(동북아 철도 구상)에서 개별 터널 담론을 계산하는 것도 의미가 달라졌고, 그 저울질 역시 정말이지 복잡해지고 있다.

이런 터에 과거의 소신 내지 고집을 반복하거나, 자신의 '감'만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것도 큰 용기다. 한일 해저터널 관련 논의에서 기업인들이 적당한 시점에서 손을 뗀 일은, 언젠가 박흥식의 일본 어선 600척 수입 논란을 빚은 아집과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높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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