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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은 '모르쇠' 日 전범기업, 일상 속 '승승장구'

카메라·노트북부터 심지어 맥주까지…한국인의 삶과 불편한 동거

김동운 기자 | kdw@newsprime.co.kr | 2018.11.12 18:44:32

[프라임경제] 일제시대 징용피해자와 관련된 배상 판결이 새삼 관심을 모았다. 지난달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강제징용)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70년이 넘었지만 아직 강점기 관련 배상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에 따라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이 같은 배상 판결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상금 지급 판결이 나오자 재판의 대상이 될 기업들에게 배상이나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 한국인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2012년 국무총리실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는 일제 패망 이후에도 존속하고 있는 전범기업 299개사를 발표했다. 이 가운데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범기업 수는 약 40개에 달한다. 시간이 지난다고 한국에서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크게는 국가산업 입찰에서부터 소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며 전자기기까지 우리들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이번 신일철주금 판결이 단순히 법리적인 측면이나 역사적 의미의 이슈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논점이자 우리 피부에 와닿는 밀접한 이슈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인의 먹거리 속 전범기업

해외맥주 붐으로 일본 등 다양한 국적의 맥주가 들어와 애주가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이들 중 거대 전범기업과 연관된 맥주들도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쓰비시는 전쟁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군함도'로 잘 알려진 하시마섬 탄광을 운영했던 이력 때문. 미쓰비시는 10만명의 조선인을 강제징용해 생산활동을 했고, 또 많은 희생자를 냈다. 지금도 미쓰비시는 한국의 다양한 산업 부문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 중 기린맥주가 미쓰비시의 방계회사다.

아사히맥주의 가장 큰 주주 중 한 곳인 스미토모그룹은 100곳이 넘는 강제노역장을 운영하며 조선인을 착취했다. 이번 재판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신일철주금이 스미토모금속공업과 합쳐져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미쓰이그룹의 계열사인 미쓰이광산은 일본 최대인 미이케탄광을 운영하며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다. 삿포로맥주·에비스맥주가 미쓰이그룹의 소속사로 지목되고 있다.

우리나라 조미료 '미원'의 기원으로 회자되며 친숙한 느낌을 주는 일본의 식품회사 '아지노모토'. 하지만 아지노모토는 단순한 생활소비재기업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시 스즈키 제약소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전범기업이다. 아지노모토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노 콘스프·혼다시 등의 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캬라멜과 맥주부터 컴퓨터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진출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물품 중 상당수가 전범기업의 작품이다. ⓒ 각사

한국인들에게도 인기있는 모리나가 밀크 캬라멜 그리고 모리나가 하이츄를 만든 모리나가 제과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용 전투식량을 생산했다.

한국인의 전자기기 속 전범기업

미쓰비시 계열사 중 하나인 니콘은 일본군에게 광학물품을 납품한 전범기업이다. 또한 노골적인 우익 행보를 보이는 기업이다. 2012년 6월 니콘이 운영하는 전시회장인 '니콘 살롱'에 안세홍 사진작가가 위안부를 주제로 한 사진전을 기획, 예약을 진행했다. 하지만 안세홍씨의 사진전의 주제를 알게 된 니콘 측은 이를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이에 더해 전시를 막기 위해 법정 공방까지 불사하는 추태를 보였다.

전자브랜드 파나소닉의 전신은 마쓰시타 전기다. 마쓰시타 전기는 '경영의 신'으로 유명한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창업했다. 하지만 마쓰시타 전기는 조선인 강제징용을 통해 급속 성장을 이룬 전범기업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세운 정치학교 '마쓰시타 정경숙'은 일본 우익 정치인들을 다수 배출해 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도시바는 노트북과 외장하드 등의 전자기기로 우리에게 친숙한 업체. 아울러 엘리베이터, 의료기기 등 잘 알지 못하는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거대기업이다. 하지만 도시바는 3대 전범기업인 미쓰이그룹의 방계회사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성과 화해 모색하는 전범기업도
 
이번 재판 이후 일본 정부가 전범기업들에게 배상이나 화해에 응하지 말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등의 강경한 입장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사회 전반이 전쟁 책임론을 오래도록 외면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일본 사회의 기류 속에서 해당 기업들이 스스로 화해 및 사과에 나서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몇몇 전범기업들은 소극적이지만 과거 반성 및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1933년 설립된, 일본 전통의 자동차 메이커 토요타. 이 업체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군용트럭을 납품했다. 그 결과 토요타는 전범기업이란 인식과 함께 부정적인 이미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토요타는 토요타 재단을 통해 위안부 문제 실행위원장인 재일교포 2세 야마시타 영애의 연구와 일본의 위안부 사죄 및 개인배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인 '일본 전쟁책임 센터'를 후원하며 여타 전범기업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오토바이와 피아노 등 다양한 물건을 제작하는 야마하도 일제로부터 군용 프로펠러 제작을 명령받아 납품한 이력이 있다. 당연히 위원회에서 발표한 전범기업 목록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야마하는 가수 이정석이 미국 글렌데일시의 '위안부의 날 기념행사'를 위한 기부 콘서트에 후원하는 등 간접적인 도움을 줬다.

회사명이 같아 억울하게 전범기업으로 몰리는 사례도 있다. 알파겔 샤프·제트스트림 볼펜 등 다양한 문구류를 제작하는 미쓰비시 연필은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와 이름이 같을 뿐, 서로간의 연관성이 없는 기업이다. 미쓰비시의 상징으로 알려진 세 개의 다이아몬드 마크도 미쓰비시연필이 먼저 사용했다. 미쓰비시 연필 고객센터에서도 미쓰비시그룹과 연관이 없으며 같은 상호를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과거의 역사를 직시해야 미래가 있다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 불리는 일본은 한국과 많은 부분에서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전범기업들이 과거의 과오에 대해 침묵하고 지금의 경제적 이익만을 도모하는 지금의 태도를 답습한다면 위에서 본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많은 문제적 기업에게 우리 한국인들은 '쉽게 곁을 내주고' 있다.

이재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재단 국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전범기업들의 민·관이 함께 나서야 진실한 사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국장은 "독일의 전범기업들도 처음부터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에게 배상하지 않은 기업들은 정부주도 산업에서 제외하는 방식의 제재를 통해 전범기업들로 하여금 사과와 함께 배상금을 통해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게 유도했다"고 예를 들었다.

이어 "일본정부가 주도적으로 전범기업들로 하여금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고 있다. 이럴 때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 전범기업들의 입찰 참여를 제한함으로써 자발적으로 배상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 국장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 개선도 함께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국장은 "일본 제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불매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전범기업들은 과거 청산 없이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려고만 한다. 징용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전범기업들의 물건 구매를 지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역사 인식을 갖춘 기업이 아니면 소비하지 않는다'는 소비자로서의 자존심을 우리는 세운 적이 없었다는 지적인 셈이다. 민족적 자존심을 자극하는 판결에 열광하고 금세 잊을 것이 아니라 실생활과 연계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반성이 필요하다.

이번 판결이 긴 세월의 고생 끝에 나온 것도 전범기업에 너그러운 우리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판결과 전범기업에 대한 책임 추궁과 판결의 실질적 강제집행 가능성 등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새삼 이런 생활 속 문제부터 짚기에도 어느 때보다 좋은 환경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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