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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의 건강창작소.6] 프레디 머큐리의 원조인 '레 미제라블'…그 루저들에게 양심이란 무엇인가?

 

이혁재 원장 | press@newsprime.co.kr | 2018.12.24 09:53:29

◆루저 프레디 머큐리의 원조, 빅토르 위고와 장 발장과 테나르디에

지난 칼럼을 쓸 때 600만명이었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의 관객수가 어느새 800만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제 '보헤미안 랩소디'는 2018년을 돌이킬 때 반드시 떠오르는 영화가 될 듯합니다.

이와 비슷한 영화가 2012년 겨울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영화는 뮤지컬 영화인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인 '레 미제라블'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는 이제까지 30여 편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2012년의 영화 '레 미제라블'은 '보헤미안 랩소디'가 관객수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는 592만명으로 가장 많은 관객을 모은 음악 영화입니다.

그리고 '레 미제라블'과 '보헤미안 랩소디'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이런 물음에 담겨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루저들이 양심을 지키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떠돌이 생활을 하던 빅토르 위고가 미완성 초고인 '레 미제레(Les Miseres)'를 '레비제라블'로 고칠 때도 깊이 고민했던 물음이기도 합니다.

루저로 살면서도 언제나 양심을 지키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루저 빅토르 위고는 루저 장 발장의 삶을 통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에게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거꾸로 루저로 산다고 해서 양심을 아예 내동댕이치는 일 또한 참 어렵습니다. 위고는 루저 테나르디에의 삶을 통해 이 또한 얼마나 어려울지 우리가 상상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들 가운데 오늘은 두 사람의 루저를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떠돌이 작가인 빅토르 위고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장 발장입니다. 반면교사인 테나르디에는 다음 이야기에서 만나겠습니다. 간직하기도 어렵고 내버리기도 어려운 양심! 과연 양심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이 물음은 다음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까지 내내 이어가려고 합니다. 그럼 너스레는 거두고 이제 위고부터 만나보겠습니다.

◆떠돌이 빅토르 위고 '레 미제레'를 '레 미제라블'로 성숙시키다

영화의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은 1862년에 책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고는 이미 1845~1848년 사이에 '레 미제레'라는 이름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프랑스 낱말 '레 미제레(les miseres)'는 △가난 △비참 △가엾음 △짓밟힘의 뜻을 가진 추상명사입니다. 이와 달리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은 △가난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 △가엾은 사람들 △짓밟힌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위고는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관심을 옮기게 됩니다.

이렇게 바뀐 이유 가운데에는 1848년에서 1852년 사이 프랑스에서 일어난 정치적 변화가 큰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왕당파를 지지했던 위고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공화주의를 지지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추방당한 떠돌이' 망명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위고가 이런 곤경을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삶은 많이 힘들어집니다.

하지만 떠돌이 망명 생활이 위고에게 곤경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가치의 성숙과 문학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이 생활이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나는 그 까닭을 '루저의 삶'에서 찾고 싶습니다. 위고가 떠돌아다니는 동안 루저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을 질식시키는 무지와 비참함을 깊이 느끼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위고의 떠돌이 생활이 없었다면 '레 미제라블'은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레 미제라블'이 된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의 의미를 서문에 담다

미성숙했던 '레 미제레'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이 담긴 성숙한 '레 미제라블'로 바뀝니다. 빅토르 위고가 그렇게 바꾸고자 했던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까닭의 고갱이를 알고 싶다면, 위고가 가장 마지막까지 고치고 다듬었던 '레 미제라블' 소설의 '서문'을 읽어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서문을 거칠게 직역으로 옮긴 글은 아래와 같습니다.

금세기의 세 가지 문제들 곧, 프롤레타리아화로 인한 남성들의 타락, 굶주림으로 인한 여성들의 쇠약, (물리적이고 영적인) 어둠으로 인한 아이들의 난장이화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은 법률과 관습은, 시민문명의 얼굴을 한 채, 지구상에 인공적으로 지옥을 만들고, 거룩한 하나님의 목적을 인간의 숙명이라면서 저버리게 만들 뿐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질식사가 가능한 한, 다른 말로 해서, 지구상에 무지와 비참함이 있는 한, 어떻게 보면 이런 책들도 결코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18세기 근대 유럽은 역사의 격변을 맞고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근대적인 신분차별이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짓밟고 있었습니다. 위고가 자신의 유서에서도 강조했던 '진리와 빛남과 정의와 양심'이 실현된 새로운 법률과 관습은 아직 없었습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은 제멋대로의 강압 아래에서 노예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위고는 떠돌이 망명자인 자신도, 그리고 당시 제4신분의 모든 인민들도 '레 미제라블'이자 '루저'라는 현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위고는 마치 자신의 일기를 쓰듯이 '레 미제라블'에서 여러 루저들을 깊이 파고듭니다. '타락, 쇠약, 난장이화'의 비참함을 껴안은 양심의 눈물과 괴로움은 한 글자 한 글자 서문 속에 깊이 새겨져 생생한 흔적으로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하루 사이 두 번의 충격이 장 발장에게 일으킨 양심의 소용돌이

장 발장은 '양심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아이러니하게도 미리엘 주교의 '통 큰 거짓말'을 통해 느끼게 됩니다. 이는 '레 미제라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하지요. 장 발장이 은그릇을 훔친 뒤 헌병에게 붙잡혀 돌아왔을 때, 미리엘 주교는 한술 더 떠 은촛대는 왜 가져가지 않았는지 되묻습니다. 장 발장은 예상하지 못했던 미리엘의 대답에 충격을 받습니다.

충격을 받은 장 발장은 '앞으로 이 은을 정직하게 사는 데 쓰라'는 미리엘의 당부에 진심으로 그러겠다고 약속합니다. 장발장은 그렇게 미리엘이라는 성숙한 인격의 선한 행동을 통해서 예상하지 못했던 충격을 받게 됩니다. 여러모로 그가 태어나 처음 겪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장 발장은 얼떨떨하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미리엘 주교가 있던 디뉴의 주교관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이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멍한 상태에서, 장 발장은 우연히 프티제르베라는 굴뚝 청소하는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 장 발장은 프티제르베가 떨어뜨린 동전을 발밑에 숨긴 뒤  주지 않고 빼앗습니다.

장 발장의 몸에 밴 버릇은 그렇게 마지막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미리엘 주교와 정직하게 살기로 한 약속이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린 장 발장은 짐승 같은 자기 모습에 다시 두 번째 충격을 받게 됩니다. 정직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자마자 곧바로 약속을 깬 자기 모습에 충격을 받고서, 장 발장은 말할 수 없이 큰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루 사이에 받은 두 번의 충격으로 장 발장은 양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빠지게 됩니다. 이 양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 발장은 힘들게 거듭 태어나려고 몸부림칩니다. 마침내 그는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사람답게 살겠다는 매우 어려운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은 너무 힘들고 벅찬 삶입니다. 이제 그는 다른 누군가가 양심에 어긋나게 산다고 해서 그것을 탓할 틈조차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양심의 커다란 소용돌이에 어긋나는 자기 잘못이 대부분 먼저 떠오를 테니까요.

그렇게 장 발장은 자기의 생애를 응시하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여러 흉악한 자신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깊은 참회의 눈물이 그 모습을 얼마나 씻었을까요? 얼마가 지났는지는 몰라도 장 발장은 내면에서 한 줄기 환한 빛을 봅니다. 그 빛은 바로 그의 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장 발장은 그 빛이야말로 참다운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 뒤로 장 발장은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를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양심, 다시 말해,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양심의 의무를 다하려던 그는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게 됩니다.

◆24601, 마들렌, 9430, 포슐르방, 르블랑, 파브르, 장 발장 그리고 목숨과 양심

위고는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이름인 장 발장을 1861년 3월20일이 돼서야 정했습니다. 위고는 '레 미제라블'의 서문을 쓸 때만큼이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초고인 '레 미제레'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장 트레장'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잠시 '자크 수'가 되기도 합니다. 1861년 2월1일에는 이름이 '장 블라장(Jean Vlajean)’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마침내 위고는 블라장(Vlajean)의 자음과 모음의 순서를 바꿔서 '장 발장(Jean Valjean)'이라고 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은 장 발장으로 불린 적이 별로 없습니다. 1796년에 빵을 훔쳐서 잡혀간 뒤로 그는 자기 이름을 잃고 '24601'이 됩니다. 4번의 탈출을 꾀하면서 그는 19년의 세월을 강제 노역을 하게 됩니다.

1815년에 출소하고 나서는 몽트뢰유 쉬르 메르에서 '마들렌'으로 변신합니다. '마들렌'이라는 이름은 성서에서는 회개하는 죄인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샹 마티에'라는 사람이 '장 발장'으로 누명을 쓰자 결국 자수했던 1823년에는, 죄수번호 '9430'이 이름을 대신합니다. 이 즈음 오리온호에서 선원을 구한 뒤 바다로 뛰어내리면서, 그는 아예 이름이 불릴 일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신분세탁'을 하고 파리에서 살고 있던 그는 몇 달 지나지 않아 자베르에게 발각이 됩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기던 그는 코제트와 함께 담을 넘어 수녀원으로 도망칩니다. 그곳에서 지낼 권리를 얻기 위해 처음에는 관에 들어가 산 채로 매장될 위기를 맞기도 합니다.

수녀원에서는 포슐르방 노인의 도움으로 동생인 '윌팀 포슐르방'이 되어 형제처럼 살게 됩니다. 5년 뒤 수녀원을 떠나고 나서는 사람들에게 '르블랑 씨'와 '위르뱅 파브르'로 통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코제트와 결혼한 마리우스 앞에서 지난 과거를 밝히고 나서야 다시 자신의 이름인 '장 발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장 발장은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힘들게 살면서도 많은 죽어가는 목숨을 살립니다. 몽트뢰유 쉬르 메르에서는 불 속에 갇힌 2명의 아이와 마차에 깔린 포슐르방이 살아납니다. 팡틴은 감옥행을 벗어나고, 그녀의 딸인 코제트는 장 발장의 딸이 되어 보살핌을 받게 됩니다. 장 발장이라고 누명을 쓴 샹 마티에는 장 발장의 자수로 풀려납니다. 오리온호의 한 선원도 목숨을 구합니다.

자베르마저도 장발장의 도움으로 살아납니다. 장 발장은 코제트의 남편이 될 마리우스도 목숨을 걸고 구합니다. 그렇게 장 발장은 어떤 이름으로 살더라도, 그리고 어떤 곤경이 있더라도, 미리엘 주교와 프티제르베를 만나던 날의 충격들을 잊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여러 '레 미제라블'의 목숨들 곁에는 언제나 장 발장이라는 루저의 양심이 함께 합니다.

◆양심을 지키고 정직하게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빅토르 위고가 떠돌이 '루저의 삶'을 살지 않았다면 '레 미제라블'은 세상의 빛을 보기 어려웠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레 미제라블'에 있는 여러 루저인 '레 미제라블'을 만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타락, 쇠약, 난장이화'의 비참함을 껴안은 '양심의 눈물과 괴로움'의 흔적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끝내 우리는 △가난 △비참 △가엾음 △짓밟힘의 뜻을 아는 척 허세만 부리고 △가난한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 △가엾은 사람들 △짓밟힌 사람들과 함께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짐승' 루저인 장 발장은 늘 모른 척하고 싶은 유혹,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질투, 몸이 끊어질 듯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장 발장은 자기처럼 양심을 갖고 정직하고 착하게 살라고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장 발장은 그저 사람이 양심을 지키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힘든지를 몸소 알려주기만 합니다.

그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지 보여줄 뿐입니다. 혹시라도 그에게 충격을 받고 양심을 제대로 지키며 살려는 누군가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루저 프레디 머큐리의 원조들 가운데에는 '레 미제라블'을 쓴 작가인 빅토르 위고와, 그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레 미제라블'이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루저들이 우리에게 크게 가르쳐 주는 것은 그들의 훌륭함이나 그들의 거룩함이 아닙니다. '레 미제라블'과 '보헤미안 랩소디'의 루저들은 우리에게 똑같은 물음을 온몸으로 던지기만 합니다. 바로 '루저들이 양심을 지키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물음 말입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훌륭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레 미제라블'이고 '루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얼마나 어려운가'라는 그들의 물음에 '얼마나 어려웠을지' 헤아려 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곤경이 닥치더라도 '어렵겠지만' 양심을 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을 서로에게 원하는 것은 힘들 듯합니다. 그러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가 먼저 바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을 질식시키는 무지와 비참함이 크고도 깊기 때문입니다.


도움 받은 자료들
1)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민음사
2) '레 미제라블', 톰 후퍼 감독의 뮤지컬 영화
3) '세기의 소설, 레 미제라블', 데이비드 벨로스 지음, 정해영 옮김, 메멘토
4) '개인의 탄생(Inventing the Individual), 래리 시덴톱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5) 위키백과와 나무위키


신천 함소아한의원 대표원장 / MBC 본사 의무실 한방주치의 / EBS 역사드라마 <점프> 한의학 자문 /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 / 경희대 한의학과 석사졸업·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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