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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획] 친일기업의 민낯 #1. 두산 박승직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친일 매판상인 후손'서 재계 대변자로

이수영 기자 | lsy@newsprime.co.kr | 2019.01.22 13:43:43
[프라임경제] 1919년 3월1일. 신분,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거리에 쏟아져 나온 평범한 사람들이 목청껏 울린 '만세소리'. 대한민국이 유구한 독립국이며 우리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지닌 유구한 민족임을 세계에 고한 날이다.

그 후 100년, 한 세기에 걸쳐 시대의 파고를 넘은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가치를 지닌 문명국가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압축성장과 권위주의 정권에 억눌린 곳곳에는 미처 도려내지 못한 친일잔재의 악취가 여전하다.

무엇보다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경제계에는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을 수탈하고 자본을 대가 삼아 재벌로 올라선 부끄러운 인물이 적지 않다. 재계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과거사 세탁에 열중한 후손들도 마찬가지다.

<프라임경제>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청산되지 않은 경제계 친일기업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추적하기로 했다.

"외형은 커졌지만 우리 기업들은 아직 청년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왕성한 청년기에 실수도 하지만 앞날을 향해 뛰어가는 기업들을 봐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지난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 대기업 총수·기업인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수장으로서 좌장을 맡은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은 세간의 반재벌 정서를 인식한 듯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전경련 몰락···남달라진 박용만의 대한상의

대한상의는 박근혜 정권과 함께 몰락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빈자리를 채우며 문재인 정부 들어 빠르게 영향력을 키웠다. 2013년부터 대한상의를 이끈 박용만 회장 역시 재계의 어른이자 정치권과의 공식 소통창구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 냈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의 조부이자 두산그룹의 모태를 만든 박승직. 친일 매판상인이자 기업인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박 회장의 조부가 창씨개명을 한 매판(買辦)상인이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대표적 친일경제인 박승직(朴承稷)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최근 그의 활약은 놀라우면서도 씁쓸하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독립운동 사료들에 따르면, 박승직은 1864년 6월 경기도 광주 가난한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살 때 포목행상에 뛰어든 그는 30대 중반인 1886년 8월 배오개(지금의 서울 광장시장 인근)에 '박승직상점'을 내고 이후 장사꾼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배오개 거상'으로 이름을 떨친 배경에는 지속적인 친일행적과 치밀한 줄타기가 있었다. 

일례로 대한제국이 마침내 일제의 손아귀에 떨어질 무렵인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하자 박승직은 이토를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19년에는 박영효, 최진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조선경제회' 이사에 오르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에는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인 일선융화(日鮮融和)를 강조한 경제단체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이자 평의회 임원을 지냈고, 유사한 친일조직이며 반일운동 배척을 주장한 '동민회' 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조선 청년들 전쟁터 동원에 "쌍수 들고 축하"

1930년대 후반 들어 그의 친일행각은 더욱 노골화됐다. 1938년 매일신보가 주최한 신년 간담회에서 박승직은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으며, 조선인들이 보여준 거국일치의 애국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조선통치에 있어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은 적절하므로 개선이 전혀 필요 없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38년 2층으로 확장 개업한 '박승직상점'의 입구 모습(왼쪽)과 박승직 창업자의 가족사진. ⓒ 두산그룹, 자유경제원

 

얼마 안 있어 2차 세계대전서 수세에 몰린 일본이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해 조선지원병 제도를 급조하자, 박승직은 이를 '쌍수(雙手)들어 축하'하는 담화를 내는 등 물심양면 도왔다.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박승직은 "조선지원병 제도의 실시는 내선일체의 구현이고,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됐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아울러 그가 피해자들의 상처가 아물지조차 않은 조선인 강제징용 및 위안부 모집에도 깊숙이 참여했다는 정황 역시 짙다.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박승직은 1938년 8월 조선인 강제동원을 위한 선전조직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및 평의원에 올랐다. 국민정신 총동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으로 활동한 그와 더불어 김성수(동아일보 창립자), 방응모(조선일보 사주), 김활란(이화여대 초대 총장)도 연맹 결성과 활동에 일조한 인물로 여겨진다.

◆친일재력가-엘리트 혼맥, 박정희 정권까지 맹위

일제로부터 촉망받는 사업가이자 재력가로 성공한 박승직은 혼맥을 통해 일본 패망 이후에도 사업과 사회적 지위를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딸 박영희를 당시 엘리트 집안인 이우정의 아들에게 시집보낸 것.

친일파 재력가와 일제로부터 대례기념장을 두 개나 받은 판사가문이 힘을 합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이후 박정희 정권까지 미쳤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승직의 사위가 된 이인기는 교사 출신으로 1939년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젠다오성공서(間島省公署·간도성공서) 민생청 시학관에서 공직을 시작했다. 

이후 1941년 친일단체 '흥아청년구락부'에 가입한 이인기는 이듬해 민생청 민생과장, 노무과장을 거쳐 1943년 안둥성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주목할 것은 그가 해방 이후 교육자로 변신했고 박정희 정권을 뒷받침하는 유력 지식인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일제가 패망한 후 이인기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학장을 거쳐 동대 대학원 원장에 올랐고, 특히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을 사실상 주도한 인물로 주목받았다. 

국민교육헌장은 겉으로는 우리나라의 교육 지표를 담았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본 메이지 천황시대 만들어진 '교육칙어'를 모방했다는 게 정설이다.

일부 대학교수들이 군국주의·국수주의적 가치를 내세운 일제의 교육칙어처럼 국민교육헌장이 지나치게 집단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당시 정권은 이들을 무더기 해직하고, 일부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반면 이인기는 교육헌장 제정 이듬해인 1969년 숙명여대 총장으로 영전했으며 1974년 영남대 총장직을 맡아 권위주의 정권 아래 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67년 탄생한 영남대학교는 최근까지도 부일장학회 강탈 등 사유재산 침해 논란이 뜨거웠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뒷말에 시달린 바 있다. 

한편 창씨개명으로 '미키쇼우쇼크(三木承稷)'라는 이름을 얻은 박승직은 1941년 자기 이름을 딴 가게 간판마저 '미키상사주식회사'로 고쳐 달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인 1948년 미키상사는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꿨고, 그렇게 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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