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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의 건강창작소.10] 돈키호테와 건강창작법

보르헤스·세르반테스·장자·에코에게서 배우는 몸짓언어·말언어·글언어 건강창작법

이혁재 칼럼니스트 | sijung1030@gmail.com | 2019.02.17 12:43:21

[프라임경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라는 아르헨티나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눈이 멀 정도로 책을 많이 읽었고, 눈이 거의 보이지 않을 무렵이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아르헨티나의 국립도서관장이 됩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은 '축복의 시'라는 제목의 시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

책과 함께 밤을 동시에 준 것은 하나님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축복의 시'는 그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책을 볼 수 없는 눈 먼 도서관장이 겪는 현실은 너무 아이러니합니다. 게다가 그런 처지를 오히려 '축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시의 글귀는 더욱 아이러니합니다. 이처럼 너무 아이러니한 현실의 어깨 위에는 더욱 아이러니한 싯귀가 올라타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소설도 시처럼 짧게 씁니다. 오늘 소개할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목이 좀 이상하지요? '돈키호테'라는 소설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작품이니까 말입니다. 보르헤스도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겠죠. 그런데도 보르헤스는 왜 피에르 메나르라는 작가와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일까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

보르헤스는 거울과 미로, 꿈과 환상이라는 주제로 많은 글들을 썼습니다. '돈키호테'라는 소설을 쓴 세르반테스와 가상의 인물인 피에르 메나르를 비교할 때도 이런 주제가 빠지지 않습니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라는 소설에서는 세르반테스와 피에르 메나르를 비교하는 글줄들이 그렇습니다.

보르헤스는 두사람의 '돈키호테' 작품을 비교하게 되면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지 여러분들도 아래 글줄들을 읽어 보세요.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의 소설이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몸소 확인해 보길 바랍니다.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부, 9장

'재치 넘치는 평민'인 세르반테스가 17세기에 쓴 이런 열거들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에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런 생각은 어마어마하게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현실의 기원으로 정의한다."

◆장자의 꿈과 보르헤스의 꿈

읽어보니 어떤가요? 여러분들 가운데 몇몇은 눈을 비비면서 읽고 또 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 또한 처음에 몇 번을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내 눈이 이상한가 싶어서 글줄을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도 읽어보고, 한 글자 한 글자 소리 내서 읽어보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문득 보르헤스가 왜 명확하게 두 작가의 글이 다르다고 했는지 느껴지자, 나는 그만 놀라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글을 쓴 사람이나 글을 읽는 사람이 달라지면 똑같은 글이라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보르헤스의 이런 메시지는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을 나에게 주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글을 통해 만날 때, 그 만남의 역사가 현실의 기원이 되고, 진리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겠다는 보르헤스의 생각에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동의하고 나니 보르헤스의 다른 작품들 하나하나가 좀 더 깊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위에서 뽑은 글줄들에서는 문학의 은유와 환상이 어떻게 현실을 창조하는 비결이 되는지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장자가 다시 태어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아니, 환상과 은유의 현실화를 '장자'가 나비의 꿈을 통해 잘 드러냈다고 한다면, 보르헤스는 '장자'의 거대한 어깨 위에 올라서서 꿈같은 풍경들을 더 생생하게 드러낸 것 같습니다.

◆보르헤스의 삶과 에코의 삶

여러분은 혹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 신부 기억하는지요? 작품 안에서 호르헤 신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숨겨놓은 전직 사서입니다. 그런 호르헤 신부의 모델이 바로 보르헤스라고 합니다.

에코는 "보르헤스의 삶이 없었다면, '장미의 이름'은 태어날 수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근대를 느끼고 탈근대마저도 환상적으로 제안했던 보르헤스의 삶과 글쓰기는 호르헤 신부와 많이 다르기는 합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왜 보르헤스를 그렇게 그렸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보르헤스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내 맘대로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이런 추측은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인 윌리엄 신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소설에서 호르헤 신부와 맞서는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호르헤의 모델이 보르헤스 였듯이, 윌리엄의 모델은 에코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 속에서의 '호르헤 vs 윌리엄'의 구도가 책 바깥의 현실에서는 '보르헤스 vs 에코'로 이어지도록 하려는 것이 에코의 기획이자 노림수는 아니었을까요?

사실 보르헤스가 보수주의를 지지했던 이유는 사람의 원형과 본성을 찾고 지키는 것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의 나라 아르헨티나에서의 지나친 포퓰리즘은 그의 현실창조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현실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현실창조의 역사에는 보르헤스와 같은 어른이 필요합니다. 그런 어른이 있어야 에코와 같은 젊은이가 높이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에코에게 보르헤스의 작품은 우주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담은 백과사전이자 도서관입니다. 보르헤스의 어깨에 올라탄 에코는 그의 도움을 받아 그보다 더 멀리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치 장자의 어깨에 올라탄 보르헤스가 장자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창조의 역사는 그렇게 역할을 바꿔 되풀이됩니다.

◆몸짓언어·말언어·글언어와 건강창작

건강을 지키는 일과 건강을 창작하는 일 또한 이와 비슷합니다. 춤과 노래와 같은 몸짓언어와 원초적 말언어의 만남은 신화의 세계를 지어내서 사랑을 담아냅니다. 신화의 세계에 올라타서 설득과 공감을 부르는 레토릭 말언어는 정치의 세계를 지어내서 질서를 담아냅니다. 정치의 세계에 올라타서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지혜로운 말을 옮겨 적은 경전의 보편적인 글언어는 종교의 세계를 지어내서 양심을 담아냅니다.

그리고 종교의 세계에 올라타서 가설과 모델을 세우고 검증하는 수학적인 글언어는 공허하고 동질적인 과학의 세계를 지어내서 이성을 담아냅니다. 과학의 세계에 올라타서 맨얼굴의 심연을 드러내는 토박이 글언어는 문학의 세계를 지어내서 자유를 담아냅니다. 이렇게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에 올라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두뇌개발의 과정이자 건강창작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한 사람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화의 세계와 정치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와 문학의 세계는 겹쳐포개지면서 사랑과 질서와 양심과 이성과 자유라는 가치를 함께 담는 거지요. 이러한 과정이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거꾸로 이를 버티고 견디고 이겨낼 때, 그 사람은 새로운 가치의 세계를 창조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라시아스(Gracias)! 보르헤스·세르반테스·장자·에코!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의 소설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에 기대서 나도 한번 이렇게 써보고 싶어집니다.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자, 시간의 적이며, 행위들의 창고이자 과거의 증인이며, 현재에 대한 표본이자 조언자고, 미래에 대한 상담자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윗글을 읽고 외운 뒤 손글씨로 써보면 어떨까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와 나의 돈키호테가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는 것을 손끝에서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게 손끝에서 시작한 온몸의 떨림이 어쩌면 실재(reality)를 향해 다가가는 중요한 첫 발걸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문학은 읽는 이가 책 밖으로 한 걸음을 디딜 수 있도록 도운 뒤 슬며시 사라집니다. 나는 그래서 보르헤스, 세르반테스, 장자, 그리고 에코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갖게 됩니다.

"그라시아스~ 보르헤스~!"
"그라시아스~ 세르반테스~!"
"그라시아스~ 장자~!"
"그라시아스~ 에코~!"


신천 함소아한의원 대표원장 / MBC 본사 의무실 한방주치의 / EBS 역사드라마 <점프> 한의학 자문 /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 / 경희대 한의학과 석사졸업·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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