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칼럼] 백수일기 #6 백수의 취미 생활 '노래는 나의 인생'

2019-05-13 17:05:10

[프라임경제] 축제는 끝났다. 장장 3개월을 준비했다. 3개월이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변한다고 했던가. 오늘은 트로트와 함께한 내 특별한 3개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계는 3개월 전인 2019년 초 어느 날로 돌아간다. 회사나 학교 따위 등 마땅히 갈 데가 없던 나는 그날도 변함없이 한가하게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띈 초대형 플랜카드. 전국노래자랑 울주군 편 예심. 4월25일 목요일. 울주군청 알프스홀. 

바로 이거다 

사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넘치는 흥을 억누르며 살아왔다. 최대한 근엄하게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맞춰 심각하게 살았다. 한국 직장이라도 됐으면 가끔 회식 자리에서 술 취한 척 넥타이라도 풀어 제치고 목청을 열었겠으나, 간단한 맥주 회식도 없는 뉴질랜드에서 5년간 재미없게 살아온 나였다. 

물론 'BTS 미소년들'처럼 뽀송뽀송한 외모를 갖고 태어났다면 연습생을 했을 텐데, 그들과는 정반대로 각진 외모의 가진 나였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목소리는 좋아 어렸을 때부터 음악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랬다. 전국노래자랑으로 전국 데뷔 한 번 해보자. 그것이 할 일 없는 2019년 새로운 목표가 됐다. 준비된 자만이 승리를 쟁취하는 법. '전국노래자랑' 영화를 보면서 전국노래자랑에 출전한 사람들의 생생한 후기를 섭렵했다. 

결론은 트로트 입문. 

그래도 트로트는 이글스부터 스키드로우를 거쳐 그린데이, 뮤즈와 콜드플레이 노래를 불러온 내가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니었다. 나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봤고, 지지징 하는 전자기타 소리로 시작되는 진시몽 '애수'라는 곡을 선택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난 정말'로 시작하는 가사도 멋들어졌다. '널 매일 생각했어'로 이어지는 옴팡지게 애절한 클라이막스도 마음에 들었다. 또 '보이지 않는, 환상을 쫒고 있어'로 계속되는 부분은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아버지의 비밀

트로트를 준비하는 사이 알게 된 굉장한 사실이 있다. 아버지께서 젊었을 적 가수 꿈을 품고 산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는 것. 

아버지는 배고픈 예술가 생활을 흠모한 나머지, 소금만 들고 산에 들어가 몇 시간씩 노래연습을 하셨단다. 물도 안마시다니. 국회의원들도 단식할 때 물은 마시는데. 

그래서 아버지와 나란히 읍사무소에 가서 노래자랑 신청을 했다. 내가 선택한 노래는 진시몽 '애수'였고, 아버지가 선택하신 곡은 이미자 선생님 '노래는 나의 인생'. 

동사무소 직원이 '기본 3곡 정도는 적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우리는 '필요없다'고 했다. 나는 널 매일 생각했다는 '애수' 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인생 차체가 노래인데 무슨 다른 노래가 필요하냐고 하셨다.

우리는 이렇게 '몰빵'을 결정했다. 나는 3개월간 매일 생각할 '애수'를, 아버지는 '노래는 나의 인생'으로.       

백수 인생 삼각축을 이루고 있던 독서·연극·소설연재에 트로트가 끼어들었다. 일주일에 최소한 두 권은 읽던 독서량이 한 권으로 반 토막 났다. 

아동극 배우라면 마땅히 동요를 연습해야 했음에도 불구, 트로트만 불렀다. 어린이 팬들한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올해 '오즈의 마법사'에서 양철 나무꾼을 맡은 아저씨가 동요계를 떠나 트로트계로 잠시 외도를 했다. "용서해다오 얘들아". 

소설 역시 연재 중단도 잠시 생각했지만, '연재를 멈추지 말아 달라'는 부탁으로 독자들을 위해 매일 썼다. 

이처럼 새벽에 소설을 쓰고, 하루 종일 노래연습을 했다. 같은 노래를 3분씩 12시간 넘게, 하루에 200번 정도 듣고 불렀다. 한 달(30일 기준)에 6000번. 1만번은 넘게 들으며 연습한 것 같다. 가사를 외우는 것은 물론, 숨소리 타이밍 높낮이까지 다 섭렵했다. '숨 반, 노래 반'.

노래자랑 출전일이 다가오고

노래자랑 출전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도저히 남들 앞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날은 계속해 지나갔고, 드디어 노래자랑 예선 당일이 됐다. 나는 양복을 갖춰 입고 예심장소인 군청으로 향했다. 한복이나 태권도복부터 파랑·노랑·빨강 '반짝이 의상'까지 형형색색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한 씨인 관계로 339번을 받았고, 같은 성을 쓰는 아버지는 내 바로 뒤인 340번이었다. 

예심은 오후 1시에 시작했지만, 4시가 넘도록 우리 차례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깥이 어둑어둑 해 질 무렵 드디어 차례가 왔다. 비록 반주가 없는 예심이지만, 무대 위에서 관객들 시선을 받으면서 노래를 한다.

4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만큼 '사연은 본선에서 하고, 노래나 빨리 하라'는 PD 꾸사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를 손꼽아 기다리신 분은 저희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은 가수가 꿈이셨습니다.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소금만 가지고 산에 들어가 매일 연습하셨답니다. 제가 태어나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가수 꿈을 접고, 38년이나 사무실에서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셨습니다. 

전국노래자랑에 신청을 하고 기뻐하시던 아버지께서는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지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너무나 서시고 싶으셨던 분은 제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저는 제가 3개월 동안 매일 연습했던 노래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대신 아버지께서 준비하셨던 이미자 선생님의 '노래는 나의 인생'을 부르겠습니다.

관중석에서 조그맣게 박수가 흘러나왔고, 나는 노래를 시작했다.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 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해치며, 나 지금 여기 있네.

수고하셨습니다. 노래자랑 예심은 '땡'이 없다. 그냥 '수고하셨다'는 말로 땡을 대신한단다. 무대를 내려오면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3개월간 노래에 모든 것을 바친 나 자신에게, 그리고 38년 동안 나를 기르느라 꿈을 포기하신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드렸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한성규 청년기자

*해당 칼럼은 사단법인 '청년과미래'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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