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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분노의 시대', 그리고 김수영의 적(敵)

 

변승주 청년기자 | jaysjsj3@gmail.com | 2019.05.13 17:17:29
[프라임경제] 뉴스에 분노가 넘쳐난다. 같이 공감해서 분노할수 있는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발생한다. 국회에서는 입법과 재정이 아닌, 멱살 잡기와 폭언이 오가며, '국민을 위한다'던 국회의원은 뇌물 수수나 성 접대 의혹으로 검찰에 출석했다. 

분노할 '적(敵)'이 세상에 너무 많다. 

시인 김수영이 살던 시대도 그랬다. 사방에 적이 있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된 시인 김수영은 이북으로 끌려간 뒤 고생 끝에 서울로 돌아가지만, 경찰에 체포돼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겨우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후 그는 방황한다. 그 때문일까. 김수영 시에는 적이 자주 등장한다. 시 △적 △적1 △적2에 이어 '하…… 그림자가 없다'에도 '적'이라는 시어가 등장하고, '도적'라는 시도 있다. 과연 그에게 적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시 '적1'에서 김수영은 누구나 무슨 적이든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적 없는 사람은 없다. 적은 우리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나와 적에 대해 무엇인가 계속 의심하고, 또 고민하게 만든다. 

데카르트 철학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와 관련지어 생각하면 적은 우리를 생각하고, 결국 존재하게 만든다. 그 적은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오늘 맞이하는 적이 가장 무섭고 무거운 듯 보이지만, 내일은 또 다른 적이 다가온다. 시인에게 있어 적은 자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혹은 의심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러나 시인은 "가끔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김수영 시 적1 中)"한다. 이제는 '적'이 '내부 적'이 된다. 외부에 있는 적은 무찌를 수 있다. 하지만 내부 적은 싸워 이겨냈다 싶으면 다시 생겨나고, 무시하면 마음 편해지는 존재다.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 있어 무사태평하다.

나는 분노한다. 그러나 분노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 체념하기도 한다. 외부의 적, 내부의 적 모두 무시하고 태평으로 지내고 싶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넘기고, 신문 사회·정치면을 내일로 넘기고, 어렵고 복잡한 고민도 내일로 미룬다. 

그렇기에 내 하루하루는 태평하다.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은 태평하고 싶지 않다. 오늘의 적을 오늘 이겨내고, 내일의 적을 내일 이겨내고 싶다. 

그럴 때마다 김수영을 생각한다. 위대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머니에게 '이 지경에서도 식구들을 몰라라 할 수 있느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려운 집안 사정을 방관했던 신인 김수영을. 

그가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음에도, 어머니에게 욕을 하고 행패를 부렸으며, 친구 덕분에 취직한 이후에도 방 안 기물들을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김수영을. 

그러면서도 "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 내 내면에는 사실 얼마나 많은 도적이 살고 있는가"(김수영 시 도적 中)라고 시를 쓰며 외면하고 싶은 본인 모습을 마주한 김수영을.

그리고 태평하게 살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김수영이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봤다면 내가 못 그럴 이유가 없다. 김수영이 그랬듯 나도 내부의 적을 마주하련다. 그리고 태평이 아닌 의심으로, 외부의 적을 마주하겠다. 

분노의 시대에 분노하다 못해 체념하기 보다는, 분노가 아닌 냉철함으로 그들과 나를 바라볼 때다.



변승주 청년기자

*해당 칼럼은 사단법인 '청년과미래' 활동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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