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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타이거즈 해부③-1] 경기 승패 감독과 코치의 책임일까

 

김형환 객원기자 | saesedae@hanmail.net | 2019.06.11 17:56:38

[프라임경제] 사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기사를 쓰기 전부터 김기태 감독의 퇴진을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공교롭게 첫 번째 기사를 썻던 5월 15일인 다음날 김기태 감독은 사퇴를 했다.

김기태 감독은 소통하는 감독으로 덕장이자 명장으로 불리우기 충분한 감독이었다. 그럼에도 기아타이거즈를 사랑하는 많은 팬들은 퇴진을 요구했다.

퇴진 요구가 불붙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불길은 커져만 갔다. 결국 기아타이거즈 팬들이 한때 사랑했던 김기태 감독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사실 김기태 감독은 프로야구에 입문 당시부터 고초를 겪었다. 서림초등학교와 충장중학교, 광주 제일고등학교에 이어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김기태 감독은 당시 해태타이거즈 영입 1순위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쌍방울레이더스에 지명됐다. 쌍방울레이더스가 어떤 팀인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당시 해태타이거즈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남기게 된다.

무등경기장 야구장에 모였던 해태타이거즈의 팬들은 경기의 승패를 떠나 7회말이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로 시작되는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라 잃음 슬픔을 달래며 민족의 한과 저항을 담아낸 노래로 평가받고 있는 목포의 눈물은 1980년 5월 18일로 기억되는 광주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야구가 끝나면 북구 임동에 있었던 무등경기장부터 현 국립아시아 문화전당이 있는 구 전라남도 도청까지 5km 남짓되는 거리를 '도청'을 외치며 때론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긴 행렬을 이어갔다.

무등경기장에서 야구 경기가 개최되는 날이면 거의 반복되었다. 당시 전국은 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이라 불리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발표, 1989년 조선대생 이철규열사 사망사건 등 매우 어수선했다.

이러한 시기에 해태타이거즈는 광주 시민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헤아리듯 4년 연속 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정권 차원에서는 대책이 필요했으리라. 적어도 호남민이 다시 결집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성 싶다. 호남민을 갈라놓아야 했고 결국 준비되지 않았던 쌍방울을 내세워 1989년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레이더스를 창단하기에 이른다.

쌍방울레이더스는 1990년 창단 후 1년간 2군에서 경기를 치루었고 1991년에 정식 프로야구 팀으로 승격해 1군 정규리그에 참여하게 됐다.

연고지 지명권이 있었던 1991년 쌍방울레이더스는 군산상고와 연세대를 졸업한 투수 조규제를 1차 지명으로 선발했고 신생팀 특별지명으로 광주일고와 인하대를 졸업한 내야수 김기태를 비롯해 투수 강길용, 김경수, 김동수, 박성기, 박진석, 정창화와 내야수 김상재, 송인호, 정학원을 지명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해태타이거즈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었던 김기태는 쌍방울로 가게 됐으리라. 그러나 타고난 타자이자 성실한 타자였던 김기태는 1992년과 1993년 지명타자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연속 수상한다.

당시 최약체로 평가받았던 쌍방울레이더스는 1991년 투수 조규제의 최다세이브와 최우수 신인상, 1992년 김기태의 최고 출루율, 1993년 투수 조규제의 최다 세이브 포인트(세이브+구원승), 1994년 김기태의 최다 홈런 및 최고 장타율, 1995년 김광림의 타율 1위, 최태원의 최다안타, 1997년 김기태의 최고출루율, 최고 장타율, 타율 1위, 투수 김현욱의 평균 자책점 및 다승 1위의 기록을 남기고 1999년 해체에 이른다.

1998년까지 쌍방울레이더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김기태는 이후 삼성라이온스에서 2001년까지, 다시 2005년까지 SK와이번스로 둥지를 옮겼고 2004년 지명타자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재기의 꽃을 피웠다.

2005년을 마지막으로 한신타이거즈에 코치 연수 후 SK와이번스 타격코치,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격코치, LG트윈스 감독을 거쳐 KIA타이거즈 감독까지 역임하게 된다.

화려한 선수생활과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던 김기태감독이 쓸쓸히 물러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은 일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고문으로 있는 '야구의 신' 김성근 전 감독은 "팬들이 가장 재미있는 야구는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야구"라고 한 바 있다. 해답은 여기에 있다.

김기태 감독이 이기는 야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물러난 것이다. 이후 박흥식 감독대행체제로 KIA타이거즈는 경기를 치루고 있다.

11승 2패의 놀라운 성적 이후 1승 7패라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성적은 승리를 위해 또 다른 감독을 요구할 수 있다.

지금 이기는 야구로 팬들에게 재미를 주는 야구를 하지 못한다면 내일 혹은 내년 그보다 먼 저 내년엔 이길 수 있는 야구를 하겠다고 선언하라. 그래도 KIA타이거즈 팬들은 묵묵부답으로 지기만 하는 경기보다는 믿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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