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목 칼럼]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와 덫에 빠진 한국

2019-07-18 01:24:29

[프라임경제] 지금 한국사회는 느닷없는 일본의 무역 제제로 충격에 휩싸여 있다. 매일 계속되는 정부의 대응과 발표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 내에 뜨거운 논쟁들이 계속된다. 기업들과 경제계는 초비상이다.

일본에 대항하자고 1880년대의 조선 상황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첨단소재의 개발과 기술 자립화의 시급성도 제시된다. 세계에서 가장 초라했던 무늬만 독립왕국이었던 조선의 상황이 떠오르는가 하면, 도대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 에칭가스가 무엇이며 반도체 강국의 앞날은 무엇인지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시공초월' 드라마 한복판에 있는 듯싶다.

나라가 망하고 일본에 강제 병합 당한 건 조선이 우물 안 개구리였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그 때의 위정자들을 몰아치고 비판하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비록 숨겨진 노력들이 다 알려진 건 아니나 대체로 그게 사실이고 역사다. 더구나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연달아 당하면서도 세계적 판도에는 관심이 없고, 기술과 실용에는 아예 아무 감각도 없었던 게 조선 관리들의 수준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와 지식인들의 시야와 의식은 1880년 조선과는 비교될 수 없게 넓고 깊은 것일까?

우리는 세계적으로 경제적, 지정학적 환경이 지난 수십 년과 같지 않게 흔들거리고 불편해지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한미동맹과 한일 간 우호관계가 전쟁의 폐허가 된 한국을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 그 후 중국의 현대화·개방화 과정에서 우리가 큰 시장 하나를 더해서 고급 기술을 가진 경제강국이 되었다는 것 정도는 인식한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한 후 무언가 세계 전체가 흔들리고 어수선하다고 느낀다. 지금 일본 아베 수상이 무역을 무기화하는 행위는 트럼프를 본 딴 것이라는 해석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간 한국이 번영을 누려왔던 세계적 경제, 지정학적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미국의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서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이 제시한 세계 평화, 경제 질서에 대한 야심찬 계획들에 영국의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가 이끄는 연합국들은 반대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당시 시각에서 보면 패전국들에게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는 대신 패전국, 연합국 할 것 없이 다 같이 경제건설과 자유무역을 향유하고 신생국들을 도와주자고 천명한 것은 너무나 혁명적 발상이었다. 하지만 승자·패자 할 것 없이 하나의 세계 질서에서 부흥을 도모하고 전쟁 원인을 제거하자는 제안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인 시각에서는 베푸는 시스템이고, 받아들이는 쪽에선 좀 아니꼽지만 분명히 장래가 밝아 보이는 제안이었으리라. 물론 미국이 세계 질서를 자기중심적으로 운영은 하였지만, 전문가들은 브레턴우즈 시스템으로 우선 서유럽과 일본이 부활했고 그 다음에 한국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그리고 중국을 위시한 일부 신흥개도국들이 이 체제로 큰 덕을 보았다고 평가한다.

절대적 강국에서 상대적 부국으로 위치가 바뀌고 기술 발달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는 미국에서는 그간 미국은 빼앗기기만 했다는 불만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뺏기기만 했다는 이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만 일어나고 있지 않다.

브렉시트를 기어코 강행하자는 영국과 그 반대 쪽 유럽 선진국 거의 모든 나라에서 혜택과 책임의 분담을 전제로 한 국제적 협력 체제에 대한 반감이 급격히 증대되고 있다. 낙관적 글로벌리즘이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지금 미국과 중국 간 무역 분쟁은 단순히 무역 분쟁을 넘어 앞으로 최소 30~50년 간 기술 패권과 전략적 지배력을 놓고 싸우는 대전이라고 우리는 해석한다.

미국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부분은 중국의 제조 2025로 상징되는 기술 궐기 전략이다. 중국은 이미 소요 반도체의 75%까지 반드시 자급화 하겠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투자를 하고 있다.

현재 한국 경제의 잉여 이익은 거의 전적으로 반도체 생산과 수출에 의존해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18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 중 반도체 기여도는 약 80%에 이른다. 또 한국 기업들은 전 세계적 일반 메모리 시장의 70%, 낸드 플래시(Nand flash) 시장의 50%를 점유하고 있는데 대부분 중국, 미국, 일본 기업들이 고객이다. 일본의 한국 급소 때리기가 충격적인 이유다. 문명국 답지 않다.

과거 조선은 물론 현대 한국조차 기술과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시켜준 사례들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다. 또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는 외교라는 큰 틀을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지 역사적 교훈을 일깨우는 지적들도 많다.  

KT 사장을 역임한 남중수 씨는 전문가답게 수개월 전 친지들에게 공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사회의 자성을 촉구했다.

"과거를 잊지 말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미래를 위한 외교 관계와 전략은 더욱 중요하다. 외교 관계는 국가 간 이해득실을 따지며 수시로 변화하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중략)

미·중·일 간의 역학관계에서 일본과의 전략적인 관계 설정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협력해서 상호 윈윈(Win-Win) 할 수 있는 분야가 많다. ICT 영역에서 몇 가지 언급하면, 4차 산업혁명의 기본이 되는 인공지능(AI), 스마트 공장(Smart Factory), 로봇(Robotics) 등과 같은 ICT 기술이다. 스마트 팩토리도 유사한 성격을 가진다. (중략)

이를 통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한국과 일본이 함께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다. 생산현장에서 사용하는 로보틱스(Robotics)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이 생산현장에서 로봇을 활용하는 비율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높다. 이 두 나라가 협력하면 생산현장을 위한 로보틱스 분야에서 세계를 따돌릴 수 있다. (중략) 

임진왜란의 힘든 경험을 후손들이 다시 겪지 않도록,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신숙주가 1443년 서장관으로 왜국을 다녀온 후 성종에게 '왜(倭)와 실화(失和)하지 마옵소서'라고 진언한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과오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후손들에게 미래협력의 기회를 막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교만은 가장 우둔한 전술인 동시에 참담한 결과를 잉태한다. 사람이건 나라건 교만은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이다. 중국이 지난 40년 이상을 '도광양회(韬光养晦)'라는 실리 전략을 충실히 지키면서 강국으로 부상한 교훈이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현재의 미국은 중국은 물론 동맹국들까지 압박하고, 경우에 따라 무역 제재를 가한다. 중국은 기술 독립을 선언하고 장기 항미전을 고취하고 있다. 홍콩 주민들은 중국 체제에 대한 공포심에서 연일 시위를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은 사실상 동맹국이자 가장 긴밀한 협업 파트너인 한국을 코너로 몰고 있다.

개방과 협업, 자제와 공유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질서는 각국 지도자들 간의 노력으로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나타나는 질서는 혜택이 상대적으로 손쉬웠던 그간의 질서와 질적으로 다를 것임은 분명하다. 이제 경쟁은 각축으로 변하고, 나라마다 장벽은 높아지고 있다.

일본과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김구 전생이 우리 민족에게 남긴 교훈은 문화강국이 되라는 것이었다. 세계 질서가 교란 되고, 나라마다 편협한 국익 우선을 내세우는 상황에서도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이야말로 중국, 일본과는 다른 모범적 선린 관계를 보여 달라고 한다.

김구 선생이 말씀하신 문화 강국은 문화 콘텐츠만을 의미 하는 것 같지 않다. 문명국, 문화인답게 사고하고 국제적인 역할도 하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안으로는 절치부심(切齒腐心), 밖으로는 도광양회는 최소한의 필요전술이다. 한국은 갈 길이 멀다. 후대를 위해 더 현명해져야 한다.


(현) G&M글로벌문화재단 대표 /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  (전) 외교부 주이란대사 / (전) 외교부 주뉴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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