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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윤동주 생가에서 통일 세대를 만나다

 

이병삼 전남학생교육원 교육기획부장 | jch2580@gmail.com | 2019.08.22 23:11:56
[프라임경제] 지난 8월초 전남통일희망열차학교 학생들과 함께 중국 용정시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탐방했다. 윤동주(1917.12.30.~1945.2.16.)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탄압, 유린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 말 사용을 금지하던 가장 엄혹했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아 낸 주옥같은 시편을 남긴 민족시인이다.

특히 그가 지은 '서시'는 우리나라 사람들 가장 애송하는 시 중의 하나다. 학생들은 윤동주 생가에서 우리만이 느낄 수 있는 시적 정서를 공유하고, 일제의 생체실험으로 생을 마감한 항일투사 윤동주의 흔적을 탐방했다.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 표지석과 함께 '서시'가 새겨진 커다란 시비가 생가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한글과 중국어가 함께 새겨진 표지석과 시비는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표지석에 적힌 내용대로라면 윤동주는 조선족의 중국시인이 된다. 그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났으니 중국시인이라는 강변이 표지석에서 풍겨왔다.

학사모를 쓴 그의 반신 부조상은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았던 지식인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됐다. '서시' 아래쪽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싯귀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는 돌비에 새겨서 생가로 들어가는 길목 양쪽을 도열했다. 그 모습마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윤동주는 민족시인의 범주를 넘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애송하는 시인으로 알려졌으니 그의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돌비석으로 세운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생가 안에서 윤동주에 대하여 설명을 할 수 없고, 현수막을 걸고 단체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규정을 전해 들었다. 

이미 우리들은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의거지와 뤼순 감옥, 그리고 고구려의 국내성 유적지 및 백두산 천지를 탐방하면서 이런 금지사항을 여러 차례 들어서 익숙한 상태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의 고대사를 너머 근·현대사로 확대되고 있는 현실과 바로 마주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아연실색했다.

윤동주는 중국어로 시 한 편 쓴 일이 없고, 중국 국적을 취득한 적 없이 오롯이 한민족의 정서로 똘똘 뭉친 '조선인'이다. 중학교 학적부와 일제 판결문에 적힌 그의 국적은 모두 '조선인'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한민족의 정서를 시에 담아냈다.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는 1943년 7월14일, 귀향길에 오르려고 차표를 사놓고 짐까지 부쳤으나 시모가모 경찰서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됐다.

조선의 젊은 청년 윤동주는 일제의 강압을 그냥 넘길 수 없었기에 독립활동에 뛰어들었고, 그것이 죄가 됐다. 1944년 3월31일, 2년 징역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일제는 혈장대용 생리식염수로 추정되는 생체 실험주사기를 수즙음 많은 건장한 청년의 몸에 꽂았다. 식염수에 취한 시인은 감옥에서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애타게 기다리다 1945년 2월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애국청년 윤동주의 마지막 행적이다.

그가 살았던 집 앞마당에는 외삼촌인 김약연 목사가 지은 교회당이 자리하고 있고, 조금 돌아가면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생가와 그가 다녔던 명동학교가 있다. 

그리고 용정으로 가는 길에 좌우편으로 '탈취15만원사건유지' 기념비와 '3.13반일집회유지' 기념비가 있다. 명동에서 30여리만 가면 150년 전에 우리 민족이 처음 터를 잡았던 용정이 나온다. 

용정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독립을 위해 몸 받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윤동주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승화시켜 민족시를 읊었고,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윤동주 생가를 나서면서 우리나라의 통일이 강대국의 힘 앞에서 가로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단동에서 압록강 건너편 신의주를 바라보기 시작하여 백두산 천지까지 계속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달렸다. 다시 도문과 방천에서 두만강 너머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우리 땅이 아닌 중국 땅에서 우리의 반쪽 땅을 바라보는 슬픔을 체험했다. 그리고 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고, 고대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중국의 힘을 느꼈다. 중국의 이런 강압이 어쩌면 중국의 가장 허약한 곳을 감추려는 행위로 보이기도 했다.

이병삼 부장. ⓒ 전남도교육청

학생들은 이런 현실적 제약과 강압 앞에서 허약하게 좌절하지 않고 더욱 소리 높여 통일을 외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청소년들이 꿈꾸는 통일 시대가 금방 실현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들은 분명 통일을 밑천 삼아 평화와 번영의 유라시아 시대를 선도할 세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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