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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강탈 '호텔 오쿠라'…한일경제인회의선 협력 '궤변'

이천시 환수 요구엔 묵살…숙박객 줄자 철면피

강경식 기자 | kks@newsprime.co.kr | 2019.09.27 16:51:20
[프라임경제] 23일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이하 환수위)는 일본이 강탈해 간 이천오층석탑 환수 운동에도 불구하고 석탑의 귀향이 여의치 않자 시민 모금 운동을 통한 모형 석탑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모형 석탑은 지난 달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에 제막된 '평화와 인권의 영원한 소녀 김복동상' 바로 옆에 자리할 예정이다.

석탑의 실물이 아닌 모형을 제작해 전시하게 된 까닭은 일제강점기 오쿠라재벌이 강탈해 간 후 돌려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수위에 따르면 오쿠라재단은 환수위의 영구임대 제안에 같은 수준(보물급 이상)의 문화재와 맞교환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한켠, 이천오층석탑이 전시돼 있다. 오쿠라재단은 국내 환수에 대해 사실상 거절했다. ⓒ 프라임경제

1945년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태평양전쟁은 종전됐다. 동시에 미군정(GHQ. General Headquarters)은 지주사 중심구조의 일본재벌을 해체하고 일본내 한국 국유 재산을 압수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신흥 자이바츠(재벌, ざいばつ)로 떠올랐던 오쿠라도 이때 해체를 겪게 된다.

그러나 해체 과정에서 공개매각을 목적으로 시장에 풀린 오쿠라의 지분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서민층의 붕괴가 진행된 시민들이 구매할 수 없었다. 결국 오쿠라의 공개매각 지분은 오쿠라 일가와 우호적인 자이바츠들이 다시 사들였고, 오쿠라가문은 호텔을 중심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오쿠라를 상징하는 '호텔 오쿠라 도쿄 본관'은 사설 박물관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을 운영하고 있다. 입구에는 오쿠라가문을 일으킨 오쿠라 기하찌로(大倉喜八郞)의 좌상과 함께 환수위와 이천시민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이천오층석탑'이 옥개석과 4층 모서리, 기단부 등이 손상된 채 전시돼 있다. 

마침 환수위가 모형 석탑을 제작하겠다고 밝힌 다음날 서울에서 개최된 '제51회 한일경제인회'에서 '민간의 입장에서 경제·인재·문화 교류를 통해, 양국 경제계의 신뢰관계와 양 국민의 원활한 왕래가 조성되도록 활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가 나왔다.

이 자리에는 이케다 마사미(池田 正己) 호텔 오쿠라 부회장도 일본측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전후관계는 오쿠라재단이 사실상 불가능한 영구임대조건을 내건 직후 환수위가 모형석탑 제작의도를 밝힌것으로, 환수위의 발표 바로 다음날 한국을 찾은 이케다 부회장은 이를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한국을 찾은 실질적인 목적은 일본관광객 감소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호텔 오쿠라는 일본에서만 49개의 호텔과 리조트를 운영한다. 즉 호텔 오쿠라는 한국인 방문객의 감소로 인해 치명적인 손실을 입고 있는 대표적인 여행관련 기업이다. 

따라서 한일경제인회의를 통한 호텔 오쿠라의 동의는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를 통한 양국간의 화해'보다 '숫자로 나타난 손실 보전을 위한 노력'에 가까워 보인다. '의도를 포장한 계산적인 행보'로 해석된다.

이천오층석탑 외에도 오쿠라쇼쿠간에는 다수의 수탈된 우리 문화제가 전시됐거나 보관돼 있다. 특히 국내에 기록조차 되지 못한 유물들도 다수 존재할 것으로 추측된다.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에 전시된 창업주 '오쿠라 기하찌로(大倉喜八郞)' 좌상. 일제강점기 화약을 한반도에 수출해 부를 이루고, 정치인에 기생해 문화제를 약탈해간 대표적인 일본 재벌. ⓒ 프라임경제


기록에 따르면 호텔 오쿠라의 창업주 오쿠라 기하찌로(大倉喜八郞)가 1905년 고려 숙종왕릉과 공민왕릉을 불법으로 도굴했기 때문이다. 당시 도굴 장면을 촬영한 사진과 함께 유물들은 오쿠라슈코칸에 전시돼 있다.

또 경북궁에 있던 자선당을 도쿄 아카사카의 자택으로 옮겨 대지진과 함께 사라지게 만든 주범도 오쿠라 기하찌로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본의 약탈전쟁을 배경으로 오쿠라가문은 신흥 자이바쯔가 됐고, 이제는 자신의 이름을 건 글로벌 호텔체인의 창업주로 추앙받고 있다.

문제는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 것을 넘어 오쿠라의 강탈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전통문화를 모티브로 한 상징적인 호텔을 자신의 연혁에 버젓이 끼워넣었다.

1979년 국내 호텔업이 정착하지 못한 시절, 삼성그룹은 장충동 신라호텔을 운영하며 일본의 오쿠라호텔과 15만 달러, 총매출액의 1%, 영업 이익의 4.5% 선에서 위탁경영계약을 맺었다. 

사업초기 호텔신라가 아직 갖고 있지 못한 부분을 오쿠라호텔로 부터 제공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호텔신라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부부를 비롯해 주룽지 총리, 리커창 총리 등 우리나라를 찾은 다수의 귀빈이 머물고 간 대표적인 숙박시설로 자리매김 했고, 지난해 '제7차 UNWTO 세계도시관광총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호텔신라에 따르면, 현재 양측의 관계는 마케팅 제휴 수준이다. 그러나 오쿠라 호텔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연혁에서 '1979년(쇼와 54년) 호텔 신라 오픈', '1990년(헤이세이 2년) 제주 신라호텔 오픈' 등, 부연설명 없는 호텔신라의 이름을 사용했다.

호텔 오쿠라가 직접 제작한 연표만을 토대로 '호텔 신라'와 '제주 신라호텔'은 오쿠라의 계열사로 이해되기 쉽다.

특히 오쿠라 호텔은 연혁에 거론된 대부분 업체에 대해서는 '판매제휴, 기술제휴, 식당관계자 파견' 등 자사의 기록과 타사의 기록을 구분해 언급하거나 계약관계를 서술했다. 호텔신라에 대해 구체적 서술없이 호텔 오쿠라의 연혁에 끼워넣기 된 상황.

오쿠라호텔 홈페이지(https://www.okura-nikko.com/)에서 공개된 오쿠라호텔의 연혁. 제휴관계에 관련한 설명이 없어 오쿠라호텔의 사업장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 프라임경제


따라서 고의적으로 호텔신라가 오쿠라의 사업장으로 인식되도록 표시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관련해 호텔신라는 "예약하는 과정에선 '제휴'관계가 확인된다"며 "연혁 부분에 대해서도 오쿠라 측에 설명하고 수정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오쿠라 호텔이 한일경제인회의에 부회장을 파견하고 협력을 외쳤다. 해당 사실만으로 '초청기업=친일파, 참여기업=전범기업'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기에 충분하다. 

한일경제인회의의 진의 여부와 관련없이 오쿠라 호텔의 철면피 행보만으로도 우리 국민이 일본과 오쿠라 호텔을 찾지 않을 이유는 하나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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