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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테르의 정열' 사랑한 신격호…'껌' 하나로 일궈낸 '롯데'

국내 유통 · 관광 산업 현대화 토대 구축…한·일 오가며 그룹 키워

추민선 기자 | cms@newsprime.co.kr | 2020.01.22 14:54:24
[프라임경제]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롯데'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기업명과 상품명으로 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베르테르는 그의 여인 샤롯데에 대한 사랑에 있어 정열 그 자체였습니다. 그 정열 때문에 그는 즐거웠고 때로는 슬펐으며 그 정열 속에 자신의 생명을 불사를 수 있었습니다. 일 할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정열이 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즐겁게 이겨낼 수 있지만, 정열이 없으면 흥미도 없어지고 일의 능률도 없어집니다. 경영자의 정열과 직원 모두의 정열이 하나의 총체로 나타날 때 그 회사는 큰 발전이 기약됩니다. 뜨거운 정열을 갖고 업무에 임해달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재계의 마지막 창업 1세대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99세를 일기로 19일 별세했다.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껌 사업을 시작해 롯데를 국내 재계 5위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껌' 사업으로 시작…초콜릿 시장도 장악

일제강점기에 배움을 열망하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관 연락선을 타고 도일해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한 일본인 투자자의 출자로 1944년 커팅 오일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 딛게 된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젊은시절 모습. ⓒ 롯데그룹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격적으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한 채 문을 닫게 되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다. 

첫 사업이 폭격으로 공장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1년도 채 안돼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온다. 또한 청년 사업가 신격호는 껌 사업에 뛰어든다. 워낙 껌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라 신 명예회장은 큰돈을 번다. 

그는 드디어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게 된다. 이때 회사 이름 '롯데'가 탄생한다. 문학에 심취했던 청년 신격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온다. 

1961년 신격호 명예회장은 일본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초콜릿 생산을 결단한다. 초콜릿 산업은 과자 사업 중에서는 중공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제조방법이 까다롭다는 얘기다. 

신 명예회장은 유럽에서 최고의 기술자와 시설을 들여오면서 초콜릿 시장을 장악하고 이것이 롯데가 종합메이커로 부상하는 밑거름으로 된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한다.

◆1967년 롯데제과 설립…모국투자 시작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롯데회장 인사말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의 꿈은 조국 대한민국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보국(企業報國) 이라는 기치아래 폐허의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에 착수해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투자를 시작했다.  

롯데제과에 이어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現 롯데푸드)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으며 롯데호텔과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또, 호남석유화학(現 롯데케미칼)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관광 불모지에 대규모 호텔업 투자

'한국의 마천루' 1973년 당시 동양 최대의 초특급 호텔로 장장 6년간의 공사 끝에 문을 연 롯데호텔에 붙여진 찬사였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1천여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6년여 기간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5000만달러가 투자됐다.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신 명예회장의 결단으로 탄생한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다.

◆백화점 사업에 도전, 1979년 12월 롯데백화점 오픈  

한국전쟁 이후 경제개발과 국토재건 사업에 집중해온 우리 정부는 1970년대 후반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을 진행했다.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비 욕구와 구매 패턴이 다양해졌지만, 유통업을 대표하는 백화점의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미흡했다. 

1979년 롯데쇼핑센터 개장. ⓒ 롯데그룹


1970년대 우리나라 백화점은 대부분 영세하고 운영방식이 근대화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 명예회장은 국가 경제의 발전과 유통업 근대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백화점 사업에 도전하게 된다. 

롯데쇼핑센터(現 롯데백화점 본점) 건립공사는 1976년 시작해 1979년 12월에 완료됐다. 규모는 연면적 2만7438㎡, 영업면적 1만9835㎡에 지하1층, 지상 7층에 이르렀다. 이는 기존 백화점에 비해 2~3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당시부터 고객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며 이후 우리나라 1위 백화점의 위치를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호남석유화학 인수…'롯데케미칼' 석유 산업 진출 

애초에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에 투자해 모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특히 제철사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정부가 제철사업은 국영화한다는 방침을 정하면서 이러한 희망을 접어야 했다.

이후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하면서 비로소 신 명예회장은 중화학 기업에의 꿈을 이루게 된다. 호남석유화학은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면서 설립한 국영기업이었다.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 ⓒ 롯데그룹


단지조성 후 정부는 호남석유화학을 민영화한다고 발표했고, 롯데는 공개입찰을 거쳐 1979년 이를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그해 호남석유화학은 여천단지 내 3개의 공장을 완공하고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폴리프로필렌(PP), 에틸렌옥사이드(EO)와 에틸렌글리콜(EG)의 상업생산을 시작하며 우리나라 석유화학산업을 이끌어 나가게 됐다.

호남석유화학은 케이피케미칼 등 국내 유화사와 말레이시아의 타이탄케미칼 등을 인수하며 롯데그룹 성장의 한 축으로 성장했고, 2012년 '롯데케미칼'로 사명을 바꾸고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한국 랜드마크 꿈꾼다"…'롯데월드타워' 국내 관광산업 활성화 앞장

서울 잠실에 테마파크를 포함한 대규모 관광위락시설 '롯데월드'를 건설하는 동안, 신 명예회장은 또 하나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석촌호수 서호를 중심으로 건설되는 롯데월드와 함께, 석촌 동호를 중심으로 종합관광단지(당시 명칭 제2롯데월드)를 건설해 잠실 지구를 한국의 랜드마크로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복합 관광명소로 키워내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롯데는 1982년 제2롯데월드사업 추진 및 운영 주체로 롯데물산을 설립하고, 1988년 1월에는 서울시로부터 사업 이행에 필요한 부지 8만6000여㎡를 매입했다. 그리고 다음해 실내 해양공원을 중심으로 호텔, 백화점, 문화관광홀 등을 건립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서울시에 제출했으나 일부 조건 미흡으로 반려됐다. 

이후 사업 허가를 받기 위한 지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각종 교통, 도시계획 등의 이유로 사업계획이 잇달아 반려됐다. 단순한 백화점이나 쇼핑시설, 아파트 등을 건설하면 충분히 사업성이 있는 부지였지만, 신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소를 짓겠다는 일념으로 제2롯데월드의 건설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2017년 5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롯데월드타워를 방문한 모습. ⓒ 롯데그룹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지상 123층 높이 555m의 초고층빌딩을 포함해 80만5782㎡에 이르는 '롯데월드타워' 전체 단지의 건축 허가가 최종 승인됐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돼 2014년 10월 롯데월드몰과 아쿠아리움을 시작으로 시설들이 순차적으로 오픈했으며, 2017년 4월3일 롯데 창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초고층빌딩을 포함한 롯데월드타워가 그랜드 오픈했다. 30여 년에 걸친 신 명예회장의 집념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이자 최대 규모의 쇼핑몰로 탄생한 롯데월드타워는 고용 창출 및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한편, 서울의 랜드마크로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며 국내 관광산업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순탄치 않았던 말년 

롯데를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지만, 신 명예회장의 말년은 자식들의 경영권 분쟁과 각종 비리혐의로 인한 구속으로 순탄치 않았다. 두 아들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을 지켜보며 정신감정까지 받은 비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2015년 장남인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과 차남인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이 터지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 과정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의 손을 들어준 신 명예회장은 한일 롯데그룹의지주회사 격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국내 계열사 이사직에도 퇴임해 형식적으로도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특히 경영권 갈등 속에 정신건강 문제도 드러났고, 90대 고령에 수감 위기에 처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법원은 정상적인 사무처리 능력이 없다며, 사단법인 선을 한정후견인(법정대리인)으로 지정하는 등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2017년 8월에는 롯데알미늄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롯데그룹 내에서 모든 공식 직책을 내려놓고 사실상 이름뿐인 회장이 됐다. 

그해 12월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과 함께 경영비리 혐의로 징역 4년 및 벌금 3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법정 구속은 면했다. 

2018년 6월 법원 결정에 따라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레지던스에서 소공동 롯데호텔로 거처를 옮긴 이후 건강이 악화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으며, 끝내 신 명예회장은 두 아들의 화해를 보지 못하고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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