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칼럼] "굿바이, 프린세스"

2020-04-21 12:14:14

[프라임경제]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잠시 동네 한 바퀴 걸을까. 벌써 여기 저기 꽃도 피고 봄이 왔네. 얼마 전에 생일이었지. 어디 보자. 내가 팔십이 넘어도 눈은 좋아. (풀밭에 앉아 한참을 두리번 거린 뒤) 그래 여기 있네. 행운을 가져다 주는 네잎클로버. 생일 선물로 너무 약소하지만 받아줘."

20여년 전 경기도 하남시 무허가 판자촌 일대 잡초밭에서 팔순의 할머니와 필자는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콜라 한 캔을 사이에 두고 둘만의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다.

소녀와 같은 앳된 모습의 작고 왜소한 체구의 할머니지만 눈빛만큼은 당시 20대 후반의 필자 보다 더욱 매서운 그런 분이었다.

필자는 친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집에 있던 오래된 사진앨범에서만 뵈었다. 필자가 태어나기 두 달전 돌아가셔서, 하남시 팔순의 할머니는 늘 나에게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할머니셨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2월에 돌아가셨고, 얼마전 49제를 치뤘다. 향년 103세라는 나이로 격동의 20세기를 온전히 겪어내셨다.

▲20여년 전 옹주와 함께 예전 사진을 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 프라임경제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아들 의친왕의 차녀로 태어난 할머니 '이해원'.

황제의 손녀로 궁에서 태어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 내시들의 공동묘지 옆 무허가 판자촌에서 노년을 보내다 병원과 요양원을 오가며 병마와 싸우다 지난 2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옹주의 황실명은 이진(李珍), 아명은 이길운(李吉雲), 법적 이름은 이해원(李海瑗)으로 의친왕이 살던 사동궁에서 자라 종로소학교와 경기고녀(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충청 제일 갑부집에 시집을 갔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편이 납북된 뒤 홀로 자녀를 키우면서 힘겨운 삶을 이어 나갔다.

궁에서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다 보니 수 많은 이들에게 사실상 강탈당하듯 재산을 빼았겼고 그 사이 어린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곤궁한 삶을 살았지만 황실 자손의 기개는 잃지 않았다.

필자와 옹주마마가 함께한 시간들을 되돌려 보면 참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지난 황실 가족들의 이야기,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 이구 황태손의 부인인 줄리아뮬럭 리(Julia Mullock LEE) 여사와의 만남, 국립고궁박물관 수집 유물 고증 등 지금 글을 쓰면서도 당시의 장면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해원 옹주는 결혼 후 남편이 게이오 대학에 수학을 하고 있던 터라 일본에서 학업을 진행하면서 결혼 생활을 했다.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제에 의한 강제 결혼 정책과 동화 정책으로 일본에 억류돼 있던 상태였다.

황태자 영친왕은 일본왕의 왕비 간택에서 임신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 떨어진 나시모토 궁의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을 한 상태였고, 광무황제의 외동따님인 덕혜옹주는 일본에서도 가장 외지인 대마도주와의 강제 결혼이 단행됐지만 곧 정신병동에 감금을 당하고 딸 정혜양도 현해탄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좌측 부터 줄리아 여사, 이해원 옹주, 필자. 2005년 서울. ⓒ 프라임경제

그리고 이해원 옹주의 큰 오라버니인 이건 황손도 의친왕의 장남이기에 일본의 귀족과의 강제 결혼을 하게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둘째 오라버니이자 운현궁의 주인으로 유일하게 일제의 동화정책에 반대한 이우 황손은 일제의 광기 어린 침략적 정책으로 강제로 일본 장교로 차출돼 떠돌아 다니는 신세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조선의 수 많은 청년과 아녀자들을 속칭, '황군'의 일원으로 전쟁 참여를 강요당하면서 강제 징집과 징용 그리고 대한의 딸들을 그들의 더러운 전쟁에 참가시켜 육체와 정신이 멍들게 했다.

황실의 구성원들도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했는데, 이우 황손도 일본군의 일원으로 중국에 있으면서 강한 독립의 의지를 보이자 일제는 히로시마로 강제 전출했고, 첫 출근 길에 원폭이 투하돼 희생을 당하는 불운을 맞았다.

20여년 전 필자는 당시의 일을 말하던 옹주의 얼굴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걸 느꼈다. 과거의 일을 떠올릴 때 가족들 이야기의 중심은 단연 둘째 오빠 이우 황손이었다.

이우 황손은 의친왕의 후손 중 가장 확고부동한 독립의지를 가졌고, 일제에 의한 강제 혼혈정책에도 반대해 부인 박찬주 여사와의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을 할 정도로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강했다. 인물 또한 상당한 미남자지만 몸가짐은 언제나 황족의 체통과 위엄을 잃지 않으신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린 여동생의 눈에도 한 없이 멋진 오빠로 기억되고 있었다.
  
"운현 오빠(이우 황손)가 오는 날이 제일 좋았어. 운현 오빠가 오면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명동에서 만두를 사 먹기도하고 스케이트 장에서 놀다가 찬주 언니가 오면 데이트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슬쩍 자리를 피해주기도 했지. 늘 따뜻하게 이뻐해 주던 오빠가 오늘 따라 너무 보고 싶어."

필자와 이해원 옹주와의 인연에서 2005년은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었다. 조선의 27대왕이자 대한제국 2대 융희황제의 동생이자 황태자인 영친왕의 아들, 이구 황태손의 붕어 소식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당시 생존해 계신 황손 중 가장 큰 어른이 바로 이해원 옹주였다. 세상이 바뀌고 옛 영화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집안의 큰 일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곧 실망과 절망으로 이어졌다.

여전히 뭉치지 못하는 황실 집안, 각자의 이익만 내세우는 인간군상들 사이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는 사이 고령의 육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2년 전, 10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하면서 즐거워 하던 모습이 함께한 마지막 사진으로 남았다. ⓒ 프라임경제

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힘겨운 여인의 삶을 공유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비 줄리아뮬럭 리 여사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가장 즐거워 했던 장면이었다.

서로의 삶이 너무 비슷해서 그랬던 것일까. 당시 이해원 옹주를 모시고 덕수궁 돌담길 끝 자락에 있던 정동아파트의 줄리아 여사의 숙소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힘겹게 살았지만 필자와 함께 나눈 이야기는 다시 100년 이후에도 회자될 수 있게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 또한 운명이라고 생각된다.

항상 맑은 눈과 반가운 미소로 사람을 배려해 주신 옹주마마의 모습은 필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늘 꿈 속에서만 만났던 어린 시절 모습으로 돌아가 그리운 오빠들과 행복했던 시간을 영원히 누리시길 기원하며, 흰 저고리 단발머리 소녀의 해 맑은 미소가 영원하길 바래 본다.

마지막으로 옹주마마의 장례와 운구, 위패를 사찰에 모시는 순간까지 자리를 함께한 후배 노병우 기자에게 이 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종엽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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