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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구 칼럼] '아니, 그게 아니고'를 추방하자

 

김영구 칼럼니스트 | press@newsprime.co.kr | 2020.05.25 11:16:47

[프라임경제] 한 모임에서 지인이 "혹시 아니셔티브(anitiative)라는 말 아세요"라고 물었다. 대화의 주도권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이니셔티브(initiative)'는 알겠는데 '아니셔티브'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래서 "모르겠는데, 신조어인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웃으면서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만든 신조어입니다"라고 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그의 아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MBA를 받은 뒤 미국 월가의 한 금융기관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미국 회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인과 한국인의 대화법 사이에 독특한 차이를 발견했다고 한다.

미국인들은 대화 중에 '맞아요(You're right, O.K)' 등의 긍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이 있는 반면, 한국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어보면 "아니"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인은 틈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분석해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아니" 또는 "아니 그게 아니고"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니!"라는 말과 대화의 주도권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인 '이니셔티브'를 합쳐 '아니셔티브'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보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뒤 필자도 회의, 식사, 술자리 등의 대화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긍정적인 내용의 대화에서는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타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거나 반박할 때, 또는 다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정이나 반박 의도 없이 습관적으로 "아니!"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토론 문화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다. 토론을 해야 하는데, 일방적인 주장만 하거나 말싸움이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방송사들도 시청률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고민하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토론 방송'이라고 한다.

TV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상대방의 주장에 논리적으로 대응, 반박하기보다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자신의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등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런 문제점이 지적된 지 오래 됐지만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언어습관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중에 "아니!"라는 말도 포함돼 있다고 본다.

내가 어떤 내용에 대해 열심히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를 듣고 있던 상대방이 "아니!"라면서 말을 끊고 들어오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의견이 통째로 부정당한 느낌이 든다.

그런 심정이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은 마음도 생길 리 없고, 수긍되는 부분이 있어도 어깃장을 놓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대화나 토론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겠는가?

대화나 토론을 잘 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하고, 매너도 익혀야 한다. 언론 인터뷰나 토론에 대비해 미디어 트레이닝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어쩌면 사소해 보이기도 하는 '아니!'를 무심코 사용하는 언어습관이 없는 지를 확인해 보았으면 한다.

미국 등 영어권 국가 사람들을 만나보면 대화나 토론을 할 때 상대방의 의견이나 주장을 반박하는 듯한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다. 설사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도 '네 말이 많다. 그런데 내 생각은…'이라는 식으로 대화를 풀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화 기술이나 토론 기법을 배우기에 앞서 "아니" 또는 “아니, 그게 아니고”라는 표현을 쓰는지 살펴보고, 만약 있다면 추방해버리면 좋겠다.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화 중에 이런 표현을 쓰지 말자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대화나 토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


김영구 대한레이저학회 이사장 / 연세스타피부과 대표원장(피부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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