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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오늘] 눈 가린 '패거리들'을 향한 외침, 테스형!

연예계 타진요부터 여야정쟁까지…진실보다 '독사(Doxa)'에 치중하는 한국사회

장귀용 기자 | cgy2@newsprime.co.kr | 2020.10.08 08:49:17
[프라임경제] 최근 가수 나훈아 발표한 신곡 '테스형'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지난 달 30일 KBS에서 방송한 공연은 시청률 29%(닐슨 전국 기준)이라는 근래 보기 드문 폭발적 기록을 남겼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르며 세상살이에서 겪는 아픔에 대한 호소를 담은 노래를 통해 가수 나훈아가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일까? 왜 목 놓아 저 먼 이방 그리스의 고대 철학자를 찾았을까? 아마 공연 도중 던진 한 마디에 답이 있지 않을까 싶다.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나라를 지킨 것은 바로 국민 여러분들이다"

최근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코로나19라는 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야의 협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상호 헐뜯기와 인신공격, 뻔뻔한 변명이 버젓하게 자행되는데도 부끄러움은 온데 간 데 없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만개했었지만 오래도록 지속된 번영에 진실이나 진리보다는 궤변을 통한 정치적 입지다지기가 만연했다.

본래 '지혜로운 자'라는 의미의 소피스트라는 지식인 계층은 교묘한 말솜씨로 정적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결국 '테스형'도 이런 소피스트들에 의해 독주를 마시고 죽고 말았다.

소피스트들은 상대적 견해이자 신념인 자신들만의 '독사(Doxa)'에 빠져, 진리보다는 패거리 짓기에 치중했다. 대표적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말도 '본인 그 자신'이 모든 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패거리들'에게 진리인 '에피스테메(epistēmē)'는 없는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불필요한 허상'일 뿐이다.

테스형이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자, 너나 할 것 없이 편승하려는 여야의 정치인들에겐 진리를 외친 '테스형'이나 그를 부르짖는 나훈아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대정당에게 공격을 받거나 공격을 해야 할 때 '진실'보다는 '당론'을 우선하는 그들에게 '에피스테메'는 '헛소리'일터다.

패거리문화야 늘 있어왔지만 요즘처럼 국민들까지 편 가르기 하면서 서로를 원수 대하듯 한 일이 있었나 싶다. 서로를 '대깨문'이니 '보수틀딱'이란 말로 서로를 비아냥거리고, '빨갱이'니 '일베충'이니 혐오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자신이 믿는 '독사'가 '진리나 진실'다. 그리고 닫힌 시각으로 서로를 '상종 못 할 무엇'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패거리를 뛰어넘는 진리나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외톨이'다. 이상론자라는 평을 들으면 점잖은 것이고 '선비질 한다'는 표현도 요즘은 칭찬에 가깝다. 왼쪽 편에서는 오른쪽이라고 욕하고 오른쪽에서는 왼쪽이라고 돌을 던진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편 가르기가 세대간, 소득계층 간, 지역 간 갈등과 결합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개진하는 상대를 쉽게 내가 적대시 하는 '상대편'으로 규정하고 반목한다. 온 가족이 화목해야 할 명절에 정치적 견해로 부모자식이 얼굴을 붉히는 일도 허다하다.

10년 전 연예인 타블로 씨를 둘러싼 학력논란이나 최근 여야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 국민의 정쟁에서 '진실'보다는 '자신의 독단적 믿음'이 우선되는 모습이 공통적으로 읽힌다. ⓒ 프라임경제



공교롭게도 10년 전 오늘인 2010년 10월8일은 연예인 타블로 씨의 미국 스탠포드대학 졸업을 둘러싼 학력논란에 대한 경찰 수사 중간발표가 있었던 날이다. 단순 사인(私人)인 연예인의 학력과 관련한 수사에서 이례적으로 '중간발표'까지 했던 데에는 그만큼 '진실'을 둘러싼 날 세우기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타블로 씨는 억울한 학력논란 공방에서 진실을 밝혀냈지만, 아직도 일각에서는 여전히 '자신만의 믿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진실을 봐야한다. 내가 믿고 싶고 듣고 싶은 것들에게 현혹되면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패거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무심코 패거리 속에서 던진 조약돌 하나에 누군가는 치명상을 입고 피를 흘린다.

국민을 현혹하는 양쪽의 '독사'에 속지마시라. 시민이 촛불을 들었을 때도, 부동산 대란에 태극기를 들었을 때도 국민이 나섰지 정부가 나선 것은 없었다. 두 광장을 반목하게 하고 서로 칼날을 들이밀게 하는 동안 여야가 한 것은 다를 게 없다. 여당이라고 초가집에 살지 않았고 야당이라고 국민을 위해 최전방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결국 피 흘리며 국토를 지켜낸 것도 '국민'이고, 경제를 일으킨 것도 '국민'이며,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것도 '국민'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느슨하지만 질긴 연대감을 회복할 때다.

아버지 산소에 핀 제비꽃도 들국화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 피지만 늘 그 자리를 지킨다. 국민이 힘을 합치면 나라는 변한다. 오늘날에 테스형은 바로 국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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