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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달 칼럼] 마음 부산한 큰 손자의 성년(成年)

 

허달 칼럼니스트 | dhugh@hanmail.net | 2020.10.17 23:43:10

[프라임경제] 발음표기가 맞는지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늬알홍(女兒紅)'이라는 소흥주(紹興酒)를 풍미(風味) 있게 마셔본 적이 있다.

'生女必釀女兒酒, 嫁女必飲女兒紅(딸을 낳으면 꼭 술을 담가, 필히 그 술을 아이 시집 보낼 때 마시라)'의 그 '늬알홍'이다.

담긴 이야기를 풀어본다면, 옛날 옛적, 늦막에 딸을 얻은 중국 소흥(紹興) 땅의 아무개 원외(員外)가 아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려고 술을 담가 동네 사람과 연회 벌려 마신 뒤, 남은 술을 버리기 아까워 독 채 화단의 계화수(桂花樹) 밑에 묻고 그만 잊었는데, 18년만에 같은 여식(女息) 시집가는 날 문득 생각 나 꺼내 마셔보니 맛, 색깔, 향이 최고인 황주(黃酒) 아니 홍주(紅酒)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20년 묵은 소홍주 브랜드 네임 중 하나로 상품화 되어 있기도 하다.

엊그제가 2001년 태어난 큰 손자 만 19살 되는 생일이었다. 서울에 모두들 있었으면 저 낳아준 애비, 에미 함께 불러, 와인 셀라 맨 아래 칸에 이 녀석의 성년주(成年酒)로 쓰려고 보관해 두었던 2001년 산 포도주 꺼내 기념으로 마셨을 텐데….

내가 마실 복이 없어 그런 걸 어쩌나. 하는 수 없이 고모들에게 부탁해, 아이들 좋아하는 단골 이태리 식당에서 그 술 열어 성년식 기념 파티를 해 주라고 일렀다.

보관 중인 2001년 산 성년식 기념주. ⓒ 허달

오늘 매주(每週) 있는 나와의 카톡 대화 시간인데, 기다려도 전화가 오지 않는다. 목마른 사람이 할아버지이니 몸소 우물을 팔 밖에…. 한참을 벨 울리고 나서 전화 받더니,

"헤헤, 할아버지, 과제 하느라고요… 깜빡"

올해 UCLA Biochemistry 학과 입학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소집은 않고, 10월1일부터 LA-서울 간 인터넷 원격 수업이란다. 밤낮이 바뀐데다가 과제도 많고 빡센 모양이다.

방해 않으려고 며칠 뒤 시간으로 대화를 미루고, 허공 쳐다보고 앉아, 나는 이 아이 나이 19살 때 무얼 했나 생각해 본다. 육이오 때 피난 오가느라, 다른 동년배 아이들은 학업이 늦어진 경우가 많은데, 나는 오히려 올적 갈적 두 번이나 월반하여, 대학시절을 미처 철들지 못한 어린아이 멘탈로, 허송(虛送)으로 보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성년식 선물 삼아 꼭 남겨 주고 싶은 말,

"시험 때문에 공부하는 건 이제 끝났다. 대학 공부는 네 재산이 되는 역량을 쌓는 공부. 배운 것 만큼은 교수님까지 제칠 자신 있도록 깊이 천착(穿鑿)해야 한다."

이를 테면 '격물치지(格物致知)'인데, 글쎄 이런 구닥다리 말 속에 깃든 철리(哲理)가 아이들 마음에 와 닿으려나?

말 나온 김에, 이 녀석 얻었을 때 팔불출 손주 자랑했더니, 중국인 친구가 나중 손자 크거든 주라고 써준, 이를 테면 제갈공명의 금낭(錦囊) 글, 20년 된 아래 글도 족자(簇子) 만들어 보내주면 어떨지.

學如逆水行舟 不進卽退

'물길을 거슬러 배를 모는 것처럼 공부하라.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다.' 대충 그런 뜻이렷다.

인터넷 보니 100세 현자(賢者) 김형석 교수의 글 실렸다. 제목하여 '늦게 철들었고, 그래서 다행이었다'. 당신의 행복론이자, 애국론.

'성년 되었다고 이런 것 한꺼번에 몰아 보내면 건성 안 읽고 넘기겠지?' 기회 보아, 분위기 띄워 이 녀석에게 읽히고 싶어 저장 파일 속에 주워 담아 둔다.

이 부산을 떨면서도 한편,

아이비 리그에 유학하던 손자 보고싶어, 찾아가 얼굴 보고 저녁이나 사 먹인다고, 모처럼의 미국 출장 중 바쁜 시간 비집어 디투어(detour), 틈을 냈던 어떤 할아버지 경험담과 하소연 절절하게 생각 난다.

"글쎄, 이 녀석이 기숙사 로비에서 절 한번 꾸벅하더니, '저녁 사줄 테니 가자' 내말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저으면서~~"

그러면서 허탈한 웃음을 "헛, 허" 웃었다.

"'할아버지, 저 오늘 저녁 과제 밀려 밤 새워야 돼요.' 그러고 돌쳐 서지 않겠나? 원 참 나!"

밤샘 과제였을 수도, 금발 소녀와의 데이트였을 수도 있지.

그러나, 쉿, 이 말 그에게는 하지 않았었다. 핫 하.


1943년 서울 출생 / 서울고 · 서울대 공대 화공과 · 서울대 경영대학원 졸업 / SK 부사장 · SK 아카데미 초대 교수 · 한국케미칼㈜ 사장 역임 /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 · 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 · 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 저서 △마중물의 힘(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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