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달 칼럼] 숨바꼭질: 어느 날의 주인공 찾기

2020-10-30 14:54:02

[프라임경제] 유튜브(YouTube), 넷플릭스(Netflix) 등을 전전하다 지쳐, 인터넷 사이트로부터 우리말 더빙 '신삼국지' 비디오 클립을 내려 받아 보기 시작한지 한 일주일 되었다. 모두 95편이나 된다.

"도무지 이름 붙은 등장인물이 모두 몇 명이나 된대요?"

무자비한 전쟁 몹 씬 등이 꿈에 보일까 무섭다면서도 눈 가린 손가락 사이로 이따금씩 화면을 훔쳐보던 아내가 묻는다.

"정확히 천이백삼십삼명."

내가 짐짓 진지한 얼굴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질문이 있을 줄 알고 위키에서 검색하여 이미 준비해 놓았던 대답이다.

"그럼, 주인공이 누구예요?"

그 대답은 위키에 없었다.

싸리나무 꺾어 학교 뒷동산에서 칼 싸움 하던 천막 교실 중학 일학년 시절, 그 당시 삼국지 주인공은 연인(燕人) 장비와 상산(常山) 조자룡이었다.

"일성 포향(砲響) 울리는 곳에, 바라보니 장비다."

아침마다 라디오 방송으로 듣던 장민호 성우(聲優)의 삼국지연의 낭독을 기억하는 내 또래 노년의 팬들이 아마 있을 것이다. 고리눈 부릅뜨고 장팔사모 꼲아 들어, 장판교에 필마 단신으로 서서 조조 군사의 백만 군사를 막던 광경이 바로 영웅의 모습이었다. 상산 조자룡이 적진을 유린하며 혈로를 뚫어, 가슴에 안아 구해온 아기를 유비에게 바칠 때, ‘못난 자식 때문에  충성스런 상장(上將)을 잃을 뻔 했다’며 잠든 아두를 땅바닥에 던지는 유비의 퍼포먼스 스토리에 감동하면서도, 유비보다는 조자룡이 우리 영웅의 모델이었다.

한때 인기 높던 고우영 만화삼국지, 그는 누구를 주인공 삼아 스토리를 재구성하였던지 분명치 않아 잊어버렸는데, 아무튼 많은 이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유비는 아니었다. 유비 캐릭터로 자기 얼굴을 그려 넣고는 '쪼다'라며 킬킬거린 것을 보면 말이다. 

원작자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쓸 때 심중(心中)에 있었던 주인공은 누구였는지 몰라도, 이번 '신삼국지' 캐스팅을 보니, 이를 드라마화[劇化]한 감독은 적어도 조조와 제갈공명을 주연(主演)으로 보고 헤비급 배우를 투입, 배역을 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보면, 관우, 유비, 손권 등이 조연(助演),  수많은 에피소드 주인공은 단역 처리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백제성 탁고당의 진흙 소조상. ⓒ 허달

삼국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조를 조명하는 이야기를 전개하여 '조조평전(曹操評傳)'이라는 책을 쓴 작가도 있었지만, 굳이 주인공을 뽑으라면, 아무래도 나는 제갈공명을 주역으로 꼽게 된다.

그의 신출귀몰하는 전략적 천재성은 드라마의 흐름과 재미를 구성하는 요소이니 제쳐 두자. 그러나 이미 숫[算]가지 놓고 천기(天機)를 엿보아 한(漢)의 유업(遺業) 세우는 일이 이루지 못할 목표인 줄 잘 알았으면서도, 선주(先主) 유비의 탁고(託孤)를 혼신으로 이행하는 두 차례 출사(出師), 그 충절(忠節)과 비장(悲壯)의 이야기가 이제 보니 삼국지연의 전편(全篇)의 백미가 아닌가 하는 데 눈이 떠진 것이다.

오늘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읽다가, 고교시절 고문(古文) 시간에 배웠던 두보 시(杜甫 詩) '촉상(蜀相)'을 마주친 반가움에, 여러 가지 감회에 젖어 두서없는 이글을 초(抄)해 보았다.

시는 아래와 같이 읽힌다. 두시언해를 요즘 말로 고친 것이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가 찾으리오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 밖 잣나무 우거진 곳이로다  錦官城外柏森森.
섬돌에 비친 푸른 풀은 절로 봄 빛이 되었고  映階碧草自春色
잎 사이 꾀꼬리는 속절없이 고운 소리로다  隔葉黃空好音

세 번 돌아봄을 어지러이 함은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조를 거친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라  兩朝開濟老臣心
군사를 내어 가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도다  長使英雄淚滿襟
 

후세의 여러 시평(詩評) 이어진다. 첫 구(句)의 돌올함이 빼어났다 / 섬돌에 비치는 푸른 풀, 잎 사이 꾀꼬리가 경중유정(景中有情) / 이 시는 글자마다 눈물을 떨어뜨리게 하여, 차마 다 읽지 못하게 한다 / 천년 뒤에도 사람의 뜻을 슬프게 만드는구나 등.

그러고 보니, 우습다. 내 입맛 따라 대하드라마의 주인공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를 않나, 또 촉상 이 시는 분명 저 삼국 역사의 주인공 제갈공명을 기린 시인데, 시를 읽는 이들은 제갈공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두보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아하, 여러 숨바꼭질 속에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다. 이 모든 이야기를 짓고 있는 주인공이 '나'였다는 사실을…


1943년 서울 출생 / 서울고 · 서울대 공대 화공과 · 서울대 경영대학원 졸업 / SK 부사장 · SK 아카데미 초대 교수 · 한국케미칼㈜ 사장 역임 /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 · 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 · 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 저서 △마중물의 힘(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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