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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목 칼럼] 이순신을 생각한다 ⓶

 

김영목 칼럼니스트 | press@newsprime.co.kr | 2020.11.02 11:09:54

[프라임경제] 이순신이 비록 하옥되었으나 여진족과 맹렬히 싸운 그의 전투력과 기개는 이때 아마 당쟁에 몰두하는 조정 대신들의 눈에도 들었던 것일까? 여하튼 녹둔도의 사건은 조정에 어느 정도 경종이 되었을 듯 하나, 그 하잘 것 없는 여진족 세력이 머지않아 조선을 휘몰아치고 명을 멸망시킨 청 대국의 주인이 될 줄은 아무도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있었을 듯 하다.

명을 정복하겠다고 조선에게 앞장서라고(정명향도: 征明響道) 호언을 하고 나온 히데요시를 후세에 황당했다고 평가도 한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를 승계하여 일본 전국시대를 마감시킨  히데요시가 단지 개인적 야심만으로 명을 치겠다고 조선을 공략할 구상을 했을까? 아니면 전국시대를 평정하면서 무사들과 제후들을 침략전쟁으로 끌고 가야만 할 사정이 히데요시의 무모한 전쟁 시발의 배경이었을까?

분명히 일본 내 정세변화가 침략전쟁의 배경이긴 하다. 그러나 북방에서 만주 세력의 등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본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좀 더 큰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할 것 같다.

그 중 가장 큰 변화의 요인은 경제적 요인이다. 먼저 내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물산력이 상당히 팽창되는 과정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일본의 이 당시 은 생산량은 세계 2위 정도로 추산된다.

이와 관련되어 중요한 요인은 풍부한 은을 소유한 일본 지배세력은 포르투갈인들의 상륙과 이들과의 교역을 통해 이미 유럽이라는 존재, 무역의 이익을 간파하고 중상주의적 사고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즉 대항해 시대의 도래와 일본 전국시대 마감, 그리고 일본 각 지역에서 축적되고 있던 부가 히데요시의 대외 정벌 사업의 더 근본적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히데요시가 제후들을 동원하면서, 명을 정복해서 봉토와 막대한 은을 갖게 해주겠다고 공언한 것은 감언이설이라고 쳐도, 조선에 와서는 도공들 납치에 혈안이 되고, 연산군시대에 이미 조선에서 은광석 제련술 등을 가져간 것을 보면, 일본 지배층들은 이미 동양과 서양에서 필요한 교역 조건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이들은 포르투갈 등 서양인들을 통해 조총 등 신무기, 항해술 등 즉 서양의 신문명을 흔쾌히 배우고, 수입했다. (깨어나지 못한 조선은 하멜을 학대하여 도망치게 했다.)

히데요시 시대의 일본에는 '근대화' 즉 서세동점의 기운을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했다는 의미이다. 이 시기에 일본에는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기독교(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천주교인이 되었고 조선 침략의 최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도 천주교인이었다.

도성과 평양으로 앞서나가는 고니시를 가토 기요마사가 경쟁자로 나서서 조선 동북 면을 공략하였는데, 가토는 고니시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고니시의 종교가 원인이 되었는지 히데요시의 신임을 질투하여 그랬는지는 알기 어렵다. 여하튼 둘 사이의 경쟁은 후일 명일 사이의 강화회담을 복잡하게 만들고, 정유재란의 한 원인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순신이 여러 간계와 원균의 모함, 반 류성룡파의 정치적 캠페인으로 파직, 하옥되는 사건도 이 둘 사이의 경쟁, 그리고 첩자전이 작용하였다고 보여진다. 교인이어서 그랬는지, 전쟁에 지쳐서 그랬는지 고니시는 잔꾀를 써가면서라도 강화회담에 좀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고, 가토는 훼방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결국 고니시는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 돌아가 양자간 대결에서 가토에게 패배하고 죽게 된다).

강화를 도모한다 해도 고니시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조선 8도(八道) 중 4도(四道)를 영유하기 위해 끈질기게 집착한다. 왜군은 삼남에 성을 쌓고 아예 장기전으로 들어갔다. 명의 특사 심유경은 거의 고니시에게 야합한다. 명 병부는 조선에서 결코 힘들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명이 쇠약해져 있었다는 반증이다. 심유경은 여기에 동조한다. 그러나 황제는 왜의 건방을 용서할 수 없었고 조선은 끈질기게 명군이 왜군을 공격해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황제를 속인 죄로 심유경은 처단된다. 전쟁은 다시 시작된다. 잘못하면 조선의 반이 왜인들의 영유지가 될 뻔했다.

여하튼 1592~1598년 간 7년 전쟁은 조선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들고, 요동의 명군이 조선으로 내려간 사이 누루하치는 급속히 세력을 확대한다. 40년 후 조선과 명은 공히 금을 계승한 여진족 후금-청에 의해 굴복하고 만다.

1800년 중엽 일본의 존왕양이 세력이 혁명을 일으켜 '쇼군 막부'를 타도할 때까지의 평화가 있다. 이 평화시기는 소위 일본의 선각자(先覺者)라는 사람들이 1853년 Perry 미 제독의 개항 요구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주변국들 남북으로 정벌하자는 대외팽창론(요시다 쇼인), 정한론(사이고 다까모리 등) 을 꺼내며, 군국주의를 일으킬 때까지의 시간이다. 이 시간이 단순한 휴지기였을까, 아니면 일본이 힘을 기르는 시기였을까?

조선을 돌아보자. 알다시피, 임진란 후 조선은 피폐했고, 쓰러져갔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조선은 한편으로는 청에 복속하면서 한편으론 소 중화로 자처하면서 세월을 허송했다. 북학과 실학을 제창한 선각자들은 완고한 조정을 대변하지 못했다. 여하튼 16세기 말부터 근대까지 계속된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은 임진란 이후 결코 다시 일어나지 못한 조선에게 참담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후세들에게 엄청난 굴욕과 고난을 겪게 했다. 그 조선의 답답함은 기적처럼 일어난 대한민국의 오늘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일본의 근대 해군이 청일, 노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이순신을 공부하고 가르쳤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조선조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근대 해군은커녕 수군의 형체조차 없어진 걸 부끄럽기만 하게 만드는 에피소드이다.

다시 당시의 조선을 돌아보자. 임진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피폐했고, 쓰러져갔다. 그래도 임진란 당시에는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 있고 화포도 있고, 나름 전함과 병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잔존하는 행정력과 꺾이지 않는 백성들이 있었다. 조선왕조가 이 왜란에서 살아난 행운 뒤에는 엄청난 민초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다. 의병들이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강화협상 기간 중 삼남에는 조선관군, 의병, 왜군, 명군까지 뒤얽혀 계속 전투와 보복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때 백성들, 특히 삼남 지역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와중에 전함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고 화포와 화약은 어떻게 제조했으며, 백성과 군사들의 식량은 어떻게 조달할 수 있었을까? 기록에는 엄청난 군량미를 요구하는 명군과 조정이 내분을 겪고 전투도 제대로 계속되지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자. 백성 각자가 가진 것을 모두 들고 가진 재주와 능력을 갖고 하나로 힘을 합쳐 나라를 살리자고 모여들 지 않았다면 하나의 전투라도 가능했을까? 백성의 도움으로 무에서 유를 다시 만들어 낸 지도자가 이순신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조선조정은 이순신을 하옥시켰다가 백의종군시키고, 원균이 수군을 전멸시키고 한산도의 병참기지를 모조리 왜군에 빼앗긴 후에야 이순신을 다시 기용한다. 이순신이 죄인이 되어 압송될때 수 많은 병사와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이 삼도수군 통제사로 돌아오는 길에서 들린 고을 관청들에는 양식과 화약이 다 불타 없어졌고 백성들은 물론 군사들도 다 도피하여 보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이순신이 부임 소식이 전해지면서 도피하고, 흩어졌던 백성과 군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여기서 수군 재건을 시작한다.

곡창지대인 호남과 도성으로 가는 조선의 동맥 서남해 뱃길을 조선 수군이 지키지 못했다면, 히데요시의 계산대로 조선조는 고니시에게 무릎을 꿇었을 수도 있다. 두만강의 맨 바깥 땅에서 국경도 지키고 경작을 하여 군사를 먹이라는 임무를 맡아 성채 바깥 허허벌판에서 여진족과 고군분투 싸우던 이순신은 하옥을 당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나 전라좌수사가 되어 이번엔 왜군을 뱃길에서 섬멸한다. 그리고 다시 하옥에 죽을 정도의 심한 심문을 당한다. 그런데 부활하여 돌아온다. 그 자체가 기적이다.

하늘의 도움으로 다행히 조정에 류성룡이 있었고, 류성룡은 이순신을 선조에게 매번 강력히 천거한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낙향 후 남긴 쓰라린 전시 행정의 기록이다. 류성룡은 이런 내용들과 조정의 실수와 실패도 기록에 남겼다. 이런 류성룡마저 당쟁에서 밀려, 낙향하게 되는게 조선 조정의 실상이었다. 수 많은 의병장과 의병들이 당쟁과 계파 싸움으로 조정의 공훈을 받지 못하고 원통해 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시 전란이 난다면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들고 일어날 수 있었을까?

동인과 서인이 싸우고,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을 때, 이순신은 나라의 지원 없이 백성과 함께 싸우고, 결국엔 구국의 영령이 되고자 세상을 떠난다.


(현) G&M글로벌문화재단 대표 / (전) 한국국제협력단(KOICA) 이사장 /  (전) 외교부 주이란대사 / (전) 외교부 주뉴욕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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