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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달 칼럼] 향 싼 종이에 향내 나고…

 

허달 칼럼니스트 | dhugh@hanmail.net | 2020.11.19 08:17:18
[프라임경제] 요즈음 몇 차례 글을 통하여 중국 공산당의 무도한 짓거리들에 대하여 필요 이상 열을 올렸더니, 내 심사가 얼마간 뒤틀어졌나 보다. 부드럽고 좋은 주제의 글을 쓰려 해도 써지지를 않는다. 

그러기에 일찌기 굴원(屈原)은 그의 '운중군(雲中君)', '이소(離騷)' 등 시를 통하여, 난의 이슬에 목욕한 듯[沐蘭澤 含若芳], 난을 가슴에 꿰어찬 듯[紉秋蘭以爲佩], 군자는 늘 생각조차 속(俗)한 것을 멀리하고, 난과 같은 향기를 품어 유지하여야 한다고 경계하였던 것 아닐까?

기억을 더듬어 보니, 30년 전 서예 공부랍시고 송(宋)의 미불(米黻)이 쓴 유명한 행서 법첩 '이소(離騷)' 임서(臨書)할 때였다. '호강이여벽지혜(扈江離與辟芷兮), 인추란이위패(紉秋蘭以爲佩) 열 넉 자를 내려 거는 족자로 써서 작품 만든다고 스승, 동학(同學) 여러 사람 괴롭히며 법석 떨던 일이 생각난다. 글 뜻을 새기면, '강변 따라 자라는 이초(離草)와 그윽한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백지(白芷), 패란(佩蘭) 향초/약재를 한데 모아 향주머니 속에 넣고 꿰매어 차고 다닌다'라는 뜻이 되는데, 작품 내용의 향기로움에 비하여 초짜의 작업 과정은 번잡스럽고 별로 우아하지 못하였다.

추사 전각 낙관, 통음독이소(痛飮讀離騷). ⓒ 허달

굴원의 이 글 '이소'는 후세의 많은 문사(文士)들이 사랑하여 읊으며 관련된 글들을 많이 남겼는데, 근세의 작품 중에 나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남긴 전각(篆刻) 한 점이 마음에 각별하다.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추사가 이 작품에는 '통음(痛飮)하며 이소(離騷)를 읽는다' 각(刻)하여 남겼으니, 굴원에 대한 선생의 지극한 흠모와 천재 문장의 비극적 생애에 대한 애원(哀怨)이 이 다섯 글자 '각' 속에 숨어 담긴 듯 하기 때문이다.

실은 요즘의 내 강퍅한 마음을 풀어 준 따듯한 글, 오늘 아침 읽은 엄상익 변호의 손녀와의 사랑 이야기 ‘핏줄의 정’ 소개하려다 서두가 길어졌다.

시집 간 딸이 첫 아이 손녀를 낳았는데, 서툰 솜씨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외가로 데려온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첫날의 우유 먹이기, 트림 시키기, 기저귀 갈기, 옷 갈아 입히는데 아내가 팔 꺾지 말라고 당부하던 이야기, 아이를 안았을 때의 그 물컹하고 부드럽던 존재의 느낌, 핏줄의 정이 흐르는 전율 등을 찬찬하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나서 아래와 같이 막음하였다.

(전략)

녀석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옹알이를 하고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녀와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기분이 좋으냐?"

녀석이 마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내게 눈웃음을 쳤다. 손녀의 미소로 지난밤의 수고가 싹 씻겨져 나간 것 같았다.

그 손녀가 자라나 이제는 나의 스마트폰 앱을 정리해 주기도 하고 컴퓨터 작동을 도와 주기도 한다.

나는 어떤 시의 한 구절을 손녀와 만날 때 암구호로 만들었다.

손녀가 왔을 때 나는 먼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민다.
 
"손녀와 맞잡은 손"

그러면 손녀가 나의 손을 잡으면서 말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다음은 같이 결론을 말한다.

"사랑의 고리"

손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따뜻함의 상징 아닐까.

(이상, 엄상익의 ‘핏줄의 정’에서 발췌)

나도 고교 1년 생 손녀 하나 있는데, 엊그제 보내온 사진을 보니 내가 추천한 자기개발서 '7 Habits of the Effective Teens' 들고 있다. 함께 읽기로 약속하고, 다음 주부터 매주 한 시간씩 서울-자카르타 간 '구글 영상미팅'으로 만나기를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엄 변호사가 글 말미에 자랑한 손녀 딸과의 '사랑의 고리' 암구호, 좋은 스트럭츄어 아이디어 같아 본받으려고, 그럼 나는 누구 시의 한 구절을 골라볼까 궁리해 본다. 릴케, 워드워즈, 아니면 내 친구 김광규의 시 중에서? 밑천이 짧다 보니 생각 맴도는 곳이 거기가 거기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라! 난초를 옷깃에 꽂으니, 벌써 향내가 은은히 번지려 하지 않는가?


1943년 서울 출생 / 서울고 · 서울대 공대 화공과 · 서울대 경영대학원 졸업 / SK 부사장 · SK 아카데미 초대 교수 · 한국케미칼㈜ 사장 역임 / 한국코칭협회 인증코치 KPC · 국제코치연맹 인증코치 PCC 기업경영 전문코치 · 한국암센터 출강 건강 마스터 코치 / 저서 △마중물의 힘(2010) △잠자는 사자를 깨워라(2011) △천년 가는 기업 만들기(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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