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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신축년(辛丑年)의 '백(白)'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1.06 11:20:57
[프라임경제] 2021년 신축년은 하얀(白·흰 백) 소의 해다. 얼룩지고 그늘진 역병 탓인지 백색의 기운이 새삼 반갑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백의민족(白衣民族)으로 불렸다.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한 오랜 전통에서 유래된 백의민족.
 
문인이자 역사가인 최남선(1890~1957)의 '조선상식문답(1946)'에 따르면 조선 민족이 백의를 숭상함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그러한 것으로서 수천 년 전의 부여 사람과 그 뒤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의 역대 왕조에서도 한결같이 흰옷을 입었다. 

또 이런 모습을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 1832∼?)는 '금단의 나라 조선기행'에서 "옷감 빛깔은 남자나 여자나 다 희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흰색을 고결하고도 신성한 색으로 여긴 까닭에 '백(白)'의 의미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백을 떠올렸을 때 △백두산(白頭山) △백록담(白鹿潭) △백호(白虎) 등의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백의 기운과 어울리는 단어로는 청렴이 제격이다. 청렴함이란 성품과 행실이 높고 맑으며, 탐욕이 없다는 뜻이다. 청렴하려면 맑아야 한다. 묵은 각질을 제거하고 본래의 성질을 얻어야 맑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2021년 새해에는 세속의 상처들을 말끔히 벗겨내자.

다음으로는 백기(白旗)를 꼽을 수 있다. 항복의 표시로 쓰는 하얀 깃발은 투쟁을 멈추고 싶다는 뜻이다. 서로 무조건 이기겠다고 맞서다보면 점점 날카로워지고, 갈수록 험악하고 잔인한 무기를 손에 쥘 생각만 하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해악이고 고통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만이, 인생이 좇는 가치는 아니지 않는가. 투쟁하지 않는 것, 양보하고 화합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이다. 적시에 백기를 드는 것은 자신을 잘 아는 처세다. 스스로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스스로를 정복하는 지름길이다.

이와 함께 백의 기운은 순백의 종이를 떠올리게 한다. 새해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한 장이다. 여기에 일 년이라는 시간을 가득 채우려면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필력과 필체에 상관없이, 일단 꾸준해야 한다. 손에 힘을 쥐고 꼭꼭 눌러 쓴 정성들인 글씨가 끝줄까지 다다르려면 매일 조금씩 써내려가는 것이 최선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다 써야겠다는 결심은 며칠을 가지 못한다. 또 그 마음도 머지않아 해이해진다. 그러므로 한 해의 백지 한 장을 날마다 조금씩 채워나가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일 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으니, 많은 힘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백의 기운과 어울리는 단어로는 여백이 있다. 여백을 가지려면 비우고 또 비우기를 반복해야 한다.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는 여백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백이 없으면 무엇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들을 흡수해야만 성장할 수 있기에,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사람이 호감을 사고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테면 꼰대의 사고방식이 지탄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새해에는 인생을 '리셋'할 수 있다. 새해에는 다짐과 목표를 정하고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그렇게 새해와 시작은 한 몸이 될 수 있다. 시작은 생기를 불러 일으킨다. 무미건조한 공간에 스며드는 따듯한 바람을 타고 몸과 마음이 살랑살랑 동요하기 시작하면, 동력이 서서히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처음 한 발짝 내딛을 때까지가 힘들 뿐, 그다음은 많은 힘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정치체제는 출발이 좋으면 선순환을 이루며 성장할 것이네. 양육과 교육이 건전하게 유지됨으로써 훌륭한 성향이 생겨나고, 이들 훌륭한 성향의 사람은 다시 건전한 교육을 통해 선배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자랄 것이기 때문이지."

개인의 출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체를 달리해서 표현해 본다. 

"나의 출발이 좋으면 선순환을 이루며 성장할 것이고, 훌륭한 성향이 생겨나 누구보다 나은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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