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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토사물과 다를 바 없는 '악플'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2.10 17:05:45
[프라임경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것만큼 부족해 보이는 외모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입은 벌리고 있을 때보다 다물고 있을 때가 입답다. 입다운 건 뭘까. 드나들 게 있으면 벌리고 드나들 게 없으면 다무는 것이 본연의 입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은 청결해야 하며, 상하지 않은 신선함을 들여야 하고, 그 기운으로 소리를 내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기운을 차리려면 입을 벌리는 때보다 다무는 때가 많아야 한다. 

입을 다물지 못하면 간혹 위험신호가 감지되고 침이 바짝 마르고 마른기침이 새나온다. 밤새 입을 벌리고 잔 날에도 목이 칼칼하고 물을 찾는다. 

입(口)은 한자 모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구멍을 가리킨다. 열고 닫는 때를 아는 구멍이야말로 제 기능을 다하는 입이다. 

<라면을 끓이며>에서는 김훈은 "햄버거는 그 두꺼운 볼륨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하마처럼 입을 벌려서 입안으로 밀어 넣어야 하지만…"이라며, 입을 우악스럽게 벌려 먹어야 하는 햄버거를 언급했다. 

필자 또한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작은 입의 크기가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입이 작다고 햄버거를 먹지 못하는 건 아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음식으로는 쌈이 있다. 어색한 자리에서 쌈을 싸먹는 것만큼 불편한 동작도 없다. 입을 벌리고 쌈을 먹기 위한 적당한 때와 장소와 사람은 따로 있다. 그러므로 시도 때도 없이 어디에서든 입을 벌리는 사람들은 경계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크게 벌리거나 자주 벌리는 행동은 타자에게 호감을 사기 어렵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에는 입의 움직임이 둔할수록 외려 호감도는 쌓이게 된다. 그래서 경청을 잘해야 한다. 경청에 능할수록 입의 움직임이 둔화된다. 입과 귀는 함께 움직일 수 없다. 즉, 말하기와 듣기는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동작이다. 해와 달이 동시에 떠오르고 지지 않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입의 유의어로는 '말(言)'이 있다. 입과 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말도 때와 장소, 사람에 따라 구분돼야 한다. 특히 말에는 무게마저 실린다. 그 무게로 타자를 누르다시피 할 때는 그만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함부로 말하는 것도 죄에 해당할 수 있다. 함부로 내뱉은 말은 실체가 없고 보이지 않으며, 위선을 떨기도 쉽다. 말 쉽게 내뱉는 자들은 묵비권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힘까지 없는 게 아니다.

입에서 말이 나올 때는 가벼울지언정 귀로 흘러 들어가면 무거워진다. 이는 화자가 아닌 청자가 말을 재단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좋은 말을 했어도 청자가 '나쁜 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을 벌려 말을 내키는 대로 쏟아내서는 안 된다. 그 말이 누군가의 귀로 흘러 들어가면 화자는 곧장 하수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입은 다물었을 때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논어>에서도 말의 위엄을 다루는 구절이 많다. 그중에서 몇 문장 읊어보자. 

"언행을 삼감으로써 실수한 사람은 드물다.", "옛사람이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던 것은 실천이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말재주를 어디에다 쓰겠는가? 능란한 말재주로 남을 대하면 자주 남에게 미움을 받을 뿐이다."

서양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문인인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에 따르면, 호메로스 시대부터 '무기'로 적을 죽이는 전쟁과 '말'로 상대방을 설복하는 언쟁이 똑같이 취급됐다고 한다. 이처럼 말은 한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 있는 무기와도 같다. 실로 말의 위력은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미디어를 통한 소통이 넘쳐나는 사회다. 모르는 사람의 글에 댓글을 달고 하트로 마음을 전하기도 하며 서로를 팔로우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눈빛 한 번 교환한 적이 없는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길에서 행인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수월하다. 그러다보니 말로 인한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낸다. 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말이라면 최소한의 격이라도 갖춰야 하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그들이 쏟아내는 것은 말이 아니라 토사물이다. 입으로 드나드는 것은 한결같이 신선하고 영양이 있는 탓에 온기가 배어 있다. 상하고 독소를 품은 악플러의 입은 더 이상 입이 아니다. 토사물이 쏟아지는 구멍일 뿐이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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