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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3.05 11:14:07
[프라임경제] 시련에 닥치면 어떻게 하는가. 절망하거나 아니면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기 마련이다. 장애물에 맞서거나 넘어서면 단단해서고, 그렇지 못하면 부족한 탓이라 여기기 쉽다. 그럴수록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 실력을 연마하거나 강한 힘을 비축하려고 많은 시간을 들인다. 강인한 사람만이 장애물을 넘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과연 강인한 자만이 시련을 제대로 극복할까. 수많은 시련은 도처에 깔려 있다. 어느 길로 가든지 시련을 겪지 않고서는 발전하기가 힘들다. 시련은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통이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좀 더 효율적으로 넘길 수 있을까. 
 
물줄기가 곧게 흐르는 냇가에 노목이 떡하니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목의 크기와 둘레는 어림잡아 보아도 냇가의 폭과 비슷할 정도였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나뭇잎 하나가 노목 앞에서 멈췄다. 거대한 장애물을 마주한 것이다. 나뭇잎은 고민했다. 추위 때문에 얼음처럼 단단해지면 그 힘에 노목이 쓰러질까. 아니면 바람의 기운을 타고 높이 올라서 노목을 뛰어넘을까. 어떤 것도 확실한 방법이 아니었다.

잔잔히 흐르던 물줄기는 해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노목에 닿자마자 직선으로만 가겠다는 아집을 버린 것이다. 물줄기는 딱 노목의 둘레만큼 휘어지며 흘러갔다. 물줄기는 나뭇잎보다 더 쉽고 빠르게 시련을 넘긴 셈이다. 

시련을 맞닥트리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자신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려 시련을 이겨내려는 힘을 얻기 위해서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물의 유연함을 지켜보면서 생각을 달리 했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자세가 어쩌면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맞서 싸우기 위해 강해지는 것보다 받아들이고 유연해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다 싶었다. 노자의 <도덕경> 제22장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굽히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아지며, 패이면 채워지고, 낡으면 새로워지며, 덜어내면 얻어지고, 많으면 미혹된다.

나는 시련을 겪을 때마다 좌절하곤 했다. 어쩌지 못하는 시련을 마주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능력이 뛰어났다면, 선택을 잘했다면, 돈이 많았다면, 눈앞에 닥친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련은 능력이 뛰어나고 선택을 잘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삶을 잇는 마디마디처럼 누구에게나 당연하게 찾아오는 게 바로 시련이다. 물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수록 전보다 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한 것도 아니다. 노목에 걸린 나뭇잎처럼 아직 부드러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꺾일 것인지 휘어질 것인지를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야말로 생명의 본성이기에 그렇다.

그런 생명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포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포용력은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식의 배타적인 태도로는 안 된다.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각자의 뜻을 존중하면 된다. 적대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시련을 상대로 애써 대립하거나 결투할 필요도 없어진다. 물의 유연함 역시 노목의 자리를 인정했기에 가능했다. 

강해지는 것보다 부드러운 편이 낫다. 맞서 싸우지 않고도 인정하고 비켜갈 수만 있다면 그 또한 이기는 기술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나의 처세도 더욱 유연해질 것이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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