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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무위와 당위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3.19 14:32:54
[프라임경제] 최근에 부캐릭터의 약자로, 본래 캐릭터 외에 새롭게 만든 캐릭터를 뜻하는 '부캐' 열풍이 대세다. 개인의 역할과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비롯됐거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유행의 결과로 나타난 고립감으로부터 돌파구를 찾는 현상처럼 비치기도 한다. 

원인이야 어쨌든 부캐의 유행은 환영받을 만하다. 부캐라는 용어가 언급되는 TV 예능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나 또한 시청자로서 오락과 재미를 느끼기에도 충분했다. 하지만 TV 속 부캐의 성장과 결실을 지켜보면서 내 삶에도 한 번쯤 부캐를 투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일까. 부캐를 통해 세분화된 자아실현을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전보다 많아졌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당위를 좇느라 여념이 없다. 그 결과로 무위를 좇는 일이 지양되고 있는 현실이 됐다. 

사전적 의미의 당위(當爲)란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돼야 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무위(無爲)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구본형의 <인생의 중반에서 만나는 노자, 2012>에 따르면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법칙을 따르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지난날 내겐 꿈이나 장래희망 등 오로지 하나의 길을 찾는 것만이 최대의 관심사였다. 학창시절 학생기록부의 장래희망을 적는 여백도 한 칸이지 않았던가. 본캐를 찾고, 그것을 완성시키는 일, 자아를 실현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그것은 나의 당위로서 삶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런 당위가 하나쯤 더해져도 괜찮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당위'에다 또 하나의 '당위'를 더하는 것, 본캐에다 부캐까지 좇는 게 당연한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늘 바쁘다. 여러 당위를 좇는 스케줄로 하루의 시간이 꽉 채워져 있다. 시간이 없다는 변명을 입에 달고 사는 게 당연한 현실이 됐다. 어느 시대보다도 가장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의 삶이다.

오늘날은 무위를 좇는 사람이야말로 도태되기 십상인 시대다. 당위에 비하면 무위는 자아를 깎아내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함없는 줄 알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자아는 매 순간 살아 움직이는 결정체라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에 의해 잠식되고 만다. 그러므로 시시각각 싹트는 욕구를 통해 자아를 단련시키는 기회로 삼는 편이 좋다. A. 매슬로(1909~1970)의 욕구단계이론(hierarchy of needs theory, 1943)에 따르면, 자아실현의 욕구는 최상위 단계에 존재하고 있다. 자아실현 욕구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욕구로 중요한 것이다.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 자아실현이다. 자아실현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며, 이는 저마다의 능력과 가치에 따라 다르게 구현된다. 그러므로 자아실현은 '나' 이외의 어떤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그 성립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도 없다. 오롯이 자신만의 영역이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당위와 무위의 기로 앞에서 당황하기 일쑤다. 당위를 좇다가도, 금세 무위를 좇으려는 나를 발견한다. 종종 당위가 사라지거나 짐처럼 나를 짓누를 때 무위의 마음이 찾아들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자아를 깎아내는 무위를 좇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남들보다 더 빨리 뛰기를 바랐다. 하지만 무한한 당위는 존재할 수 없다.
 
당위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거나 상실하면 당위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바로 그 순간, 무위가 찾아드는 것이다. 무위의 스며듦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다. 그러니 종종 일상으로 찾아오는 무위를 애써 좇지 않아도 된다. 하지 않을 욕구를 좇는 일은 해야 할 욕구를 좇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번아웃 증후군이 야기될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돼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에 빠지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기계가 아니라서 일정한 컨디션과 체력을 보장받기 힘들다. 매일을 똑같은 감정으로 살 수도 없다. 그러니 오늘도 여러 갈래의 길을 오가며 뛰고 있더라도, 가끔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자. 무위를 좇고 있는 하늘이야말로 길이 난 땅보다도 가장 찬란하게 아름답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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