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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사유의 삶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4.09 13:28:07
[프라임경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사유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라고 했다. 짐작컨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에도 숱하게 자기 자신과 소리 없는 대화를 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대화는 익숙하다. 조금만 더 잘 것인가, 당장 일어날 것인가를 두고도 자신과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눈다. 출근할 때 입고 갈 옷이나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를 때에도 소리 없는 대화는 끝없이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 서서 풍광에 매료되는 순간마저 소리 없는 대화에 집중할 때다.
 
'사유 활동은 정신의 눈을 뜨게 하는 데 기여한다(한나 아렌트)'거나 '정신의 본질은 바로 행위다(헤겔)'라는 철학자들의 지적도, 사유는 사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성찰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싶다. 즉, 자신과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를 유의미하게 만들려면 마땅히 행동으로 옮겨야만 한다.

생각해 보면, 삶은 행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는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삶을 채우기 힘들다. 행위야말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뛰어넘는 고도의 영역이다. 게다가 그것은 선택의 몫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행위로 연결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사유하는 인간이 아닌, 행위하는 인간이 더욱 존엄을 갖는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요즘은 보고 듣는 것에만 열중한 나머지 사유가 일어날 틈이 없다. 클릭만 하면 멋들어진 이미지나 감미로운 음성을 마주할 수 있다. 아무렇지 않게 보고 듣는 시각과 청각의 부산물은 여지없이 감정을 흔든다. 그만큼 짜릿한 것도 없다. 시간이 가볍게 채워지기는 하나 무겁게 가라앉지는 않는다. 고로 늘 제자리를 사는 느낌이다. 

이런 감정을 구걸하는,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는 자신과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행위가 뒷받침되지 않으니 삶이 앞으로 나아갈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영상미디어의 출현이 그리 달갑지 않다. 

그렇다면 사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정신의 삶>에서 아렌트가 말한다. "페넬로페의 뜨개질은 사유하는 일과 같다. 그녀는 전날 밤 뜨개질한 것을 매일 아침 다시 풀어버린다."

그렇다. 오디세우스의 아내인 페넬로페야말로 사유이자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사유와 행위는 매일 반복됐다. 그녀는 단지 뜨개질을 위해서 뜨개질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날마다 사유를 하기 위해 반복된 행위를 자처했던 것이다. 

우리도 누구나 언제라도 페넬로페처럼 살 수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사유의 행위로 가능하다. 그녀처럼 뜨개질을 시작해도 되고, 작품을 감상해도 좋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유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으로도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서 사유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잠시 페넬로페를 상상했다. 오늘의 해가 떴으니 어제와 같은 뜨개질을 또 다시 시작했을 것이라고. 그것을 통해 그녀가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고 있겠다고. 사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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