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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오늘] '강기갑 설전' 김종훈, 죽어가던 'SK 배터리' 수습

'공장 빼겠다 엄포' 최종적인 미국 이익 찔러 '2조원 타결' 배경 조성

임혜현 기자 | tea@newsprime.co.kr | 2021.04.15 08:27:43

[프라임경제] LG와 SK의 배터리 분쟁이 근래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 합의 금액 소식을 남기며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미국까지 기서 치열한 대결을 펼쳤고, 결국 승리의 여신은 LG의 주장을 대거 인정했죠. 워낙 무게가 엄중한 터라, 우리 당국이 중재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 목소리까지 일찍부터 나온 바 있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한 '검투사'의 이야기를 새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는 10년 전 오늘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강기갑 당시 민주노동당(후에 통합진보당과 정의당으로 쪼개짐) 의원이 2011년 4월15일, 김종훈 당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충돌했는데요.

당시 국회는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검토로 긴장된 분위기가 흐르던 때였습니다. 이런 터에 외교 당국자가 야당 의원을 야단쳐 파문이 일었던 것이죠. 

김 당시 본부장은 이날 오전 국회 외통위 법안심사소위에서 한·EU FTA 비준동의안이 부결된 뒤, 강기갑 당시 의원과 말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화를 내며 "말씀 조심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말이 자꾸 바뀐다는 지적에 "강 의원 공부 좀 하고 이야기 하십시오"라고 날카로운 말이 날아가고, 반대편에서는 "공부 좀 하라고? 당신은 공부를 잘 하는 양반이 돼서 이렇게 불일치 엉망진창으로 만든 거야? 그 따위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국회를 무시하는 거 아냐"라고 역공이 이뤄진 것이죠.

결국 "말씀 조심하라!" 국면이 되고, 사과 요구에도 김 당시 본부장은 아무 말도 없이 회의장을 나가버렸습니다. 언론에 따라서는 당시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임종룡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김 본부장을 데리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한데요, 

임 당시 기재부 제1차관이 왜 등장하냐면 그것도 복잡한데요. 당시 EU와의 FTA는 치열한 정당 사이의 대결로 법안소위 통과가 실패하자 그냥 그 모호한 소위 미처리 상태로 외통위 본회의로 넘어가는 등 난맥상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정부에서도 긴장해서 관련 상임위에 대응, 부처별로 총출동해 있거나 콘트롤 타워 격인 고위층도 많이 여의도에 나와 있었던 것이죠.

다만 '데리고 나갔다'는 아니라고 봅니다. 곁가지로 잠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습니다. 

2011년 4월15일 김종훈 당시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강기갑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과 설전을 벌이던 장면. 김 당시 본부장은 미국과의 FTA에 이어 EU와도 FTA를 이뤄냈다. ⓒ 연합뉴스

미국도 다그치던 '오토바이' 장관급 본부장 

전반적으로 기류를 보면 사과를 할 상황이 아니었고, '검투사'라는 별명의 김 당시 본부장이 사과 요구까지 받는 상황을 아예 안 만들면 모를까, 작심하고 설전이 벌어진 터에 중간에 접는 게 불가능하다시피 하다고 봐야 맞고요. 

임 당시 차관이 데리고 나가기엔 FTA를 처리하는 저 '본부장'의 무게감이 너무 컸던 게 간과돼 있습니다. 임 당시 차관은 훗날 금융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그 인물이지요. 

김 본부장은 1952년생으로 1974년에 외무고시를 통해 외교 관료의 길에 들어섰고(외교관들은 특이하게 '입부'했다는 표현을 고집합니다. 검사들이 '임관' 표현을 즐겨쓰는 것과 비교해도 좀 특이하게 고집스럽고 독특하죠), 임 당시 차관은 1959년생에 1981년 행정고시로 공직자 생활을 시작한 경우입니다.

각종 FTA 협상을 주도한 본부장은 장관급. 둘은 연세대학교 상경계통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위아래 관계상 "아, 거, 그만 좀 해요"식으로 싸움을 퉁치면서 데리고 나가는 식으로 진화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해서 연착륙을 할 수는 있겠지요.  

통상 협상을 전담하는 자리에 장관급이라는 위상이 왜 주어졌고, 그게 중요하냐면 이 한·EU FTA 추진 와중의 충돌에 다양한 앞의 문제가 누적돼 있고 그게 김 당시 본부장의 어깨에 짐 지워져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미국과의 FTA가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가닥을 잡은 것은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김종훈'이라는 이름은 당시에도 주요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는데요.

미국 측에서는 당시에 미국 협상단을 몰아붙이면서, 때로 이렇게는 못 한다며 벼랑 끝 전술로 버티면서 협상을 일궈 냈습니다. 당시 미국 측에서 "당신이나 나나, 전생에 뭘 잘못 했기에 (외교 라인에 들어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라고 탄식을 하자, 김 당시 본부장이 "로마 시대 검투사였을 걸"이라고 맞받아쳤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요.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끝 간데 없이 싸워 보겠다는 의지도 다시금 전달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이지요. 그는 실제로 외교관 생활 은퇴 뒤에도 오토바이를 몰고 등반도 즐기는 등 저돌적인 생활 패턴으로 화제가 잠시 됐었지요.

연이은 협정문 오류 논란, 협상과 뒤통수에 지쳤다

그런 그도 과중한 업무 부담을 완전히 이기지는 못 했습니다. 그를 힘들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한·미 FTA 문제의 끊임없는 수리 A/S였는데요.

사실 이 '김종훈 vs 강기갑' 대결이 일어난 당시(2011년 4월)에는 EU와의 FTA 논의가 있었을 땐데, 이 무렵에도 사실 미국과 협상 줄다리기(표현에 따라서는 FTA 재협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자 중에는 기억이 왔다갔다 하나 스스로 의아하실 분도 계실 텐데 그 혼란한 기억이 맞는 겁니다. 미국에 다녀와서 피곤한 표정으로 기자들에게 "우리도 얻은 게 많다"고 해명성 인터뷰를 한 게 바로 2010년 12월이었으니까요.

당시 미국 당국에서는 우리 측과의 약속과 달리, 김 당시 본부장이 태평양을 건너 귀국하던 때에 자동차 재협상 내용을 자국 언론에 발표하는 등, 막판까지도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 터에 미국과의 FTA, UE와의 FTA 양쪽에서 번역 오류 등등 각종 문제가 터지고 문제가 제자리 걸음을 한 데다, 심지어 참여정부에 이런저런 연관이 있던, '정동영' 등 당시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조차, 시기가 바뀌자 그를 몰아세웠죠. "옷만 바꿔입은 이완용" 소리를 한 민주당 계열 정치인조차 있었습니다.

아, 그래서 오류 문제나 협상 저자세 문제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요? 글쎄요, 미국에서 2007년 일단락된 문제를 계속 들쑤셨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오바마 행정부가 집요하게 한국에 이 재논의 사안을 들고 와 괴롭히고, 자동차 재협상만 해도 민간에서는 좋은 평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좀 있다 다시 하도록 합니다. 

◆"재발하지 않도록 조심" 퇴직 후 오히려 '날개 달았다'

나중에 김 당시 본부장은 결국 "재발하지 않도록 조심" 정도로 사과를 하고 넘어가긴 했습니다. 결국 그해 말 훌훌 자리를 털고 외교가를 떠났죠.

시절이 안 좋아서 외교부 장관을 못 한 것이라는 분석도 대두됐지만, "그만 두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허허롭게 야인의 길을 택했습니다. 사실 외교가에는 장관급 자리가 적지 않습니다. 웬만한 주요국 대사만 해도 오히려 장관을 한 뒤에야 부임을 하기도 하고요. 통상본부장을 지냈고 굵직한 FTA마다 족적을 남겼으니, 장관 이상으로 일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야인 생활은 오래 못 갔으니, 현대자동차 영입 소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요. 만일 그가 정말로 협상을 잘못 했든지, 제2의 이완용 소리가 타당했다면 피해를 볼 영역에서 그의 진가를 이렇게 높게 매기지 않았겠죠. 또 그는 19대 국회에 보수 정당 공천으로 입성하기도 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는 바른정당 라인으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큰 교류가 없이 정치인 생활을 마무리했다는 평이 우세합니다.

오히려 바이크를 즐기고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근무 당시를 가장 좋았던 시절로 "내 마음은 샌프란시스코에 남겨 두고 왔네"라는 팝송을 즐겨 부르는, 풍류를 아는 인물로 더 오래 세인들의 기억에 입력돼 있었죠.

그런 그가 다시금 날카로운 협상장의 검투사로 나서서는 '왕년의 실력'을 보였으니, 그게 바로 SK와 LG가 미국을 무대로 벌인 배터리 전쟁이었습니다.

일단 미국에서는 LG 승, SK가 문제로 대전제는 잡은 뒤였는데요, 이 상황에 대해서 SK가 큰 타격을 받아 숨이 넘어갈 지경에 몰렸다는 분석이 돌았었습니다. 

호흡곤란으로 힘겨워 하는 상황에서, 그는 'SK이노베이션 의장' 자격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탑니다. 결국 협상은 천문학적 금액을 LG가 받기로 한 것으로 끝났지만, 불리한 조건을 최대한 덜어낸 것은 분명하다는 추가 해석 또한 유효합니다.

김 의장이 전직 통상교섭본부장으로서 인맥을 동원해 SK 입장을 강경하게 전달했던 것이 미국 정부의 합의 촉구를 이끌어 낸 것이라는 평가가 단순히 호들갑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요.

◆"마음은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왔네" 낭만 검객, SK 살리다

왜일까요? 단순히 인맥 전쟁만은 아니라고 봐야 옳습니다. 인맥을 동원해 압박한 외에도 협상의 맥락, 즉 두 한국계 기업이 차세대 먹거리인 배터리 이슈를 놓고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화해해야 미국 전체의 산업(통상) 및 외교 전쟁에 도움이 될지, 국가적 이익에서 저울질을 하는 국면에서 급소를 치는 역할을 '김종훈 협상팀'에서 했다는 풀이입니다. 

SK 측이 읍소만이 아니라, 정 이렇다면 미국에도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벼랑 끝으로 상황이 몰릴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지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수입금지 조치 시행을 막아야 한다는 뜻을 현지 정부와 정치권에 거듭 호소하는 한편, 현지 언론에 "ITC의 수입금지 판결을 뒤집지 않는다면, 공장을 빼겠다"는 엄포도 놓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관건은 미국 내 수입금지 10년 명령이 되는 구도였는데, ITC의 최종 결정은 60일 이후(현지시간 11일)에 효력이 발생하므로 이전에 양사가 합의를 통해 소송을 취하하거나,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데 명운이 걸린 상황으로 귀결됐지요.

그야말로 그룹의 명운을 건, 한국 배터리 산업의 성장세와 운명을 건 갈등에서 '검투사 김종훈'이 다시 결전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 SK를 너무 괴롭히는 것은 문제다, SK에 숨쉴 틈은 줘야 한다는 식으로 미국 당국이 몸을 틀었습니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시한을 하루 앞두고 전격 합의를 이뤄내면서 SK에 대한 ITC 수입금지 조치는 무효화, 그리고 SK가 조지아주에 짓고 있던 배터리 공장 역시 차질없이 가동을 준비하게 됐습니다.

무가에서는 칼을 죽이는 데 쓰기도 하고, 살리는 데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른 바 '활인검 논리'인데요. 검투사 김종훈의 날카로운 혀와 칼이 이번에 죽어가던 SK를 살려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공중부양 강기갑' 못지 않게 드셌던 '김종훈 본부장'의 부활이고, 한국 통상 전쟁 능력의 부활 신호라고까지 의미를 부여 못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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