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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칭찬, 인생의 결을 눈부시게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1.04.23 14:16:37
[프라임경제] 어떤 성과를 냈거나 이로운 일을 했을 때, 타인의 칭찬을 기대한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하는 사람보다 그런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듯싶다. 

칭찬에는 메마른 기운을 돋우는 힘이 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칭찬을 들으면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다. 이로써 인정을 받았다는 일말의 확신이 서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칭찬 앞에서는 두 귀를 막으려 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외려 두 귀를 활짝 열어 놓는 편이다. 나아가 오매불망 칭찬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다. 타자의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인정에도 허기져 있다. 스스로 채우지 못한 목마름 때문에, 결국 타자를 향한다. 모든 초점과 관심이 오롯이 타자의 시선으로 향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시선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 한없이 웅크리고 살랑살랑 꼬리를 쳐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간식'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어서다. 하지만 간식은 순간의 희열만 만끽하게 할 뿐이다. 몇 날 며칠을 간식으로 배를 채우다 보면, 금세 몸이 상해 낯빛이 어두워지고 만다. 건강은 간식으로는 온전히 챙길 수가 없다.

그렇다보니 칭찬을 받는 대상은 타자의 인정만으로 자존감이 채워질 게 뻔하다. 아마도 삶의 흐름 또한 타자의 눈길대로 흐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원하고 바라는 이상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타자의 시선을 따라 제 삶을 내어주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비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시선은 밖을 향하는 것보다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달콤한 것을 찾아 밖을 기웃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모든 달콤함에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먹기 좋은 달콤함만큼이나 듣기 좋은 말만 좇다가는 이가 썩듯이 인생도 보잘것없이 변질된다. 

칭찬은 그저 향기와 같을 뿐이다. 어떤 향기로움도 코로 맡으면 순식간에 사라진다. 칭찬 또한 그렇다. 그 가벼움으로는 거대한 인생을 흔들 수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인 칭찬을 경계해야만 한다. 

물론, 칭찬은 인정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한다. 인정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래서 누구나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다고 타자의 인정은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령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서운하다거나 절망을 느낄 필요도 없다. 

칭찬은 주체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타인으로부터의 칭찬이 기분 좋은 '향기'라면, 스스로가 건네는 칭찬은 그저 '향'만은 아니다. 그것은 제 안에 쌓이는 양분이 된다. 그 양분은 자아를 성장시키고, 자존감을 튼튼하게 하며 자아효능감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대개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타인의 말에 좌우되지 않는다. 타인이 건네는 어떤 시선도 본인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처세의 근간이다.

한때 나는 칭찬을, 타자를 향한 선의의 관심이라고 정의했다. 기분 좋은 말을 건네면 상대의 기분도 따라서 좋아질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네려는 마음은 부족했다. '잘하고 있어'보다는 '조금만 더'라는 말이 앞섰다. 때문에 나의 인생만 고통스럽고, 볼품없어 보였다.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로 선뜻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은 방향이다. 밖으로 향한 시선이 안을 향하도록 돌리면 된다. 자신을 향한 선의의 관심이야말로 제 기운을 한껏 높이는 양분이기에 그렇다. 그만으로도 당신의 인생의 결이 눈부시게 달라질 것이다. 


이다루 작가 /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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