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장범석의 위클리 재팬] 자민당 장기집권의 원동력, 파벌의 태동과 위력 ⑦

소수파벌 이시바파와 이시하라파의 꿈

장범석 칼럼니스트 | press@newsprime.co.kr | 2021.05.06 09:30:46
[프라임경제] 현대 일본의 정치사는 자민당 파벌 간 이합집산의 결과물이다. 1955년에 나타난 자민당의 집권 역사는 올해로 60년이 넘는다. 각 파벌은 나름의 이념과 정책을 내세워 정국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투쟁한다. 이들의 협상 결과에 따라 총리가 결정되고 내각과 당의 요직이 배분된다. 

자민당에는 7개 파벌이 있다. 의원 96명의 호소다파를 필두로 50명 안팎의 △아소파 △다케시타파 △니카이파 △기시다파 등 5개 파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소수파벌인 이시하라파와 이시바파가 도약의 기회를 엿보면서 곧 다가올 총선에 대비하고 있다. 

◆'벤처파벌' 이시바파

이시바파의 정식명칭은 스이게츠카이(水月会)다. 자민당 파벌 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파벌로 일명 '벤처파벌'로도 불린다. 이 파벌은 2015년 9월 이시바 시게루(石破 茂)가 자신이 고문으로 있던 무파벌연합회를 해산해 의원 20명으로 결성했다. 

앞서 이시바는 기자회견을 통해 "50년, 100년 앞을 내다보고 국민의 공감과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정책집단이 되겠다"며 "저 같은 사람도 정권을 맡을 수 있다면 그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시바는 1986년 돗토리현에서 전국 최연소 중의원에 당선된 이후 연속 11선을 기록 중인 중진이다. 45세 때 고이즈미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첫 입각에 성공했고, 후쿠다·아소·아베 내각에서도 각료 포스트를 유지하며 이름을 알렸다. 

특히 2012년 총재 선거에서 아베와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전국적 인물로 떠올랐다. 선거 후 아베는 이시바를 간사장에 임명했다. 당의 핵심요직인 간사장에 라이벌이 기용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시바는 대중적 인기가 높다. 총재 적합도 여론조사가 있을 때마다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린다. 이시바가 험난한 파벌 세계에 뛰어든 것도 이러한 자신감 때문이다. 그러나 자민당의 총재는 국회의원과 소수 당원에 의한 간접 선거로 선출된다. 따라서 국민의 지지도와 상관없이 뜻밖의 인물이 선출되는 경우가 많다. 

이시바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론에 의지해 2018년과 2020년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만 모두 큰 표차로 패하고 만다. 

이후 이시바는 회장 자리를 내려놓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후임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4명의 세와닌(世和人, 간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출범 당시 20명이었던 소속의원은 16명으로 줄어들었다. 스이게츠카이의 결성목적은 이시바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서다. 다가오는 총선이 그 가능성을 가늠해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단결력' 이시하라파

1998년 야마사키 다쿠(山﨑拓)가지지 의원 37명과 함께 와타나베파(구 나카소네파)를 이탈해 결성한 파벌로 정식명칭은 긴미라이(近未来)정치연구회이다. 야마사키는 외교 감각이 뛰어나고, 인망이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000년 가토파와 함께 '가토의 난'을 일으켰을 때 가토 측에서 많은 이탈자가 나온 것과 달리, 야마사키파에서는 배신자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인간성을 잘 설명해준다. 

2001년 친분이 두터웠던 고이즈미가 총리에 취임하자 야마사키는 자민당 간사장에 오르며, 포스트 고이즈미의 유력주자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2003년 총선에서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정치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2년 후 보궐선거 통해 정계에 복귀한 야마사키는 한국·중국과 관계를 중시하고 북한을 방문하는 등 외교면에서 수완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아베 총리와 마찰을 빚으면서도 주장을 관철하는 강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 자민당이 대패한 총선에서 낙선, 이듬해 참의원 비례대표를 희망했으나 고령을 이유로 공천이 거부된다. 이때 여당이 된 국민신당이 입각을 회유하지만 야마사키는 이를 거부하고 2012년 불출마를 선언한다. 그리고 7선 의원이었던 이시하라 노부테루(石原伸晃)에게 회장직을 넘긴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시하라는 미쓰즈카파(구 아베파)→가토파→무소속을 거치며 44세 첫 입각에 성공하고, 2007년 야마사키파에 합류할 때는 당 3역의 하나인 정무조사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시하라는 정치 명문가 출신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부친의 후광에 힘입은 바 크다. 

부친 신타로는 대학생 때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한편, 중·참의원 10선과 도쿄도지사를 4연임한 거물급 정치인이기도 하다. 동생 히로타카도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2005년 중의원에 당선된 이래 같은 파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시하라파는 지난해 스가 내각에서 1명이 입각하고, 1명은 당의 국회대책위원장에 발탁됐다. 

ㄸ또한 의원 수도 10명에 불과하지만, 자민당 내 최다선인 노다가 후배들을 이끌며, 협상력과 단결력을 과시한다. 창립자 야마사키는 최고고문으로 남아 파벌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장범석 국제관계 칼럼니스트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