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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웃음의 심오함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2.03.18 10:08:58
[프라임경제] 타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은 상대를 배려해 주겠다는 단언의 표현이다. 웃음이야말로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온정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래서 웃음은 소통의 시작이고, 호감의 발로(發露)다. 

또 타자를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웃음으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의 벽은 허물어진다. 기꺼이 타자에게 건네는 따스한 손길을 누가 마다할까. 그래서 필자는 만남의 자리에서 늘 웃음을 장착한다.

웃음을 짓기 위해서는 얼굴의 긴장된 근육을 먼저 풀어야 한다. 경직된 근육으로 인한 어색한 웃음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타자를 향한 편향된 사고도 접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상대의 두 눈을 올곧게 바라볼 수가 있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행위에도 일련의 노력이 꼭 필요하다. 그렇기에 웃음은 휘발성으로 귀속되지 않고, 무의미로도 귀결되지 않는다. 웃음이 참과 거짓으로 구분되는 이유다. 

그렇다 보니 나의 웃음은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는 오해를 살 때가 있다. 노력으로 건넸던 웃음이 상대의 잣대로 폄하된 적도 있다. 상대의 단상으로 나의 웃음이 왜곡될 때면 씁쓸하고 외로웠다. 웃음이 웃음거리로 전락되는 건 한 끗 차이라고 생각했다. 

한낱 웃음조차도 그러한데 말과 행동의 왜곡은 어떨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런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돋는 건 당연했다. 오해는 둘 사이의 선을 긋고, 서로를 소원하게 한다. 웃음 속 편견이 생기면 둘 사이의 관계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의 웃음 앞에서 최대한 정중하고 두터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웃음을 짓고 있는 타자의 얼굴을 결코 가벼이 흘려서는 안 된다.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바흐친은 그의 저서 <라블레와 그의 세계>에서 웃음의 효용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웃음은 아주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한, 그리고 역사와 인간에 관한 진리의 본질적 형식 중 하나다. 웃음은 세계에 대한 독특한 상대적인 관점이다.(중략) 세계의 어떤 본질적 측면들은 단지 웃음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 (출처 :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김광기 저)

웃음에는 의미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한한 힘이 있다. 슬픔이나 분노,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에도 그 부정적인 틈에서 웃음만은 살아난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웃음이야말로 생(生)의 활기를 돋게 하는 명약이 된다. 

이처럼 웃음의 힘은 명료하고 때론 강력하다. 바흐친의 말을 빗대어보자면 웃음은 아주 심오하다. 그런 심오함을 얼굴에 담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는 자의 여유는 마땅히 가늠돼야 한다.
 
그래서인지 '웃음이 헤프다'라는 말처럼 잔인한 말도 없다. 헤프다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나 행동 따위를 삼가거나 아끼는 데가 없이 마구 하는 듯함'이다(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그러므로 심오하고도 무거운 무게를 지닌 웃음을 어떤 식으로 헤프게 다룰 수 있겠는가. 단연코 웃음은 헤프지 않고, 헤퍼서도 안 된다. 웃음이야말로 웃음의 진리를 완전히 깨우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크나큰 특권이다.


이다루 작가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마흔의 온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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