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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사개론- 현대건설 총론①] 왕회장 도정정신 깃든 '건설종가'

유일무이 대통령 탄생한 '맏형' 국토개발과 산업 발전 이끌다

전훈식 기자 | chs@newsprime.co.kr | 2022.04.04 18:13:31

1947년 현대토건사로 출발한 현대건설은 우리나라 건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현재 국내 대표 건설사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있다. © 현대건설


[프라임경제] 건설사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일지라도 변화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국내 산업 기틀을 형성하고 있는 건설사들은 급변하는 시대에 역행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건설강국을 이끌고 있는 건설사들을 탐방해 '건설사개론' 시리즈를 꾸린다. 이번 회에는 현대건설 태동과 성장에 대해 살펴본다.

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왕회장'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다 쓰러져가는 자동차수리공장(아도자동차수리공장)을 인수,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렸다. 영문상호는 'Hyundai Motors Company'. 공교롭게도 오늘 날 현대차가 사용하는 영문이름과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정 회장은 새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자신은 자동차 수리비로 30만~40만원을 받은 데 반해 건설업자들은 이보다 곱절 이상 받아 가는 것이었다. 그 길로 정비소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란 간판을 내걸고 건설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1947년 5월25일의 일이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현대토건사'가 현재 현대건설(000720)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시절 현대그룹 간판기업이자 모체 기업으로, 사실상 '범현대가 시작'이다. 현 재계순위 8위 현대중공업그룹도 현대건설 조선사업부가 그 출발이었다. 

물론 시대 풍파에 적지 않은 고난을 겪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내 건설사업을 견인하는 국토개발 및 산업발전 '건설종가'로 꼽힌다. 

여기에 전 산업군을 통틀어 '유일하게 대통령이 탄생한 기업'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1965년 평사원으로 입사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1974년 불과 33세에 나이에 부사장에 올랐으며 △36세(1977년) 대표이사 사장 △47세(1988년) 회장 자리까지 꿰찬 바 있다. 

이처럼 현대건설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건설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의 풍파를 이겨내고 현재 국내 대표 건설사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있다. 

◆'범현대家 시작' 왕회장 시절 간판이자 모체기업

현대건설 태동은 1947년 5월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이 기존에 운영하던 현대자동차공업사 한 쪽에 간판을 내건 현대토건사로부터 시작됐다. 이후 건설업 호황으로 정 회장은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사와의 합병을 통해 현재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국내에 들어온 미군 숙소와 부대 등을 지으며 시공 능력을 인정받은 현대건설은 휴전 이후 이런 경력을 토대로 낙동강 고령교와 한강 인도교 등 전후복구공사를 수행하면서 건설업체로 두각을 드러냈다. 

1970년 7월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방문한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 현대건설

아울러 1956년 정관에 사업 목적을 추가한 이후 △항만준설업 △광산개발업 △건재생산업 △선박건조업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한층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2년 도급한도액 1위를 달성했으며, 1964년 11월 국내 최초 대단위 단지 마포 아파트도 건설하기도 했다. 

현대건설 사업 확장은 단순히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65년 국내 업체 처음으로 세계 16개국 29개 업체와의 경쟁 입찰을 펼친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540만달러 규모) 수주에 성공하며 본격적인 해외 시장 개척에 나선 것. 

물론 당시에는 무리한 경쟁 입찰과 현장 장비 및 경험 부족으로 많은 손해를 입었다는 평가도 제기된 바 있다. 

하지만 1967년 베트남 캄란으로 진출한 현대건설은 항만 준설 등 각종 공사를 수행하며 태국에서의 적자를 만회했으며, 1968년 사이공·홍콩·방콕·쿠알라룸푸르 등 동남아 각국에 지점을 설치하는 등 해외 활성화에 주력했다. 

아울러 태국 고속도로 시공 노하우가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이어지면서 현대건설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토대로 작용했으며, 이후 경인고속도로와 통일로 등 공사로 국내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현대건설 활약상도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졌다. 특히 1975년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공사 수주로 중동에 진출한 현대건설은 1976년 '20세기 최대의 역작'이라고 불리는 사우디 주베일산업항 공사(9억3000만달러)를 수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가 예산 30% 수준인 동시에 세계 최대 규모 공사로, 현대건설을 글로벌 건설사로 거듭날 수 있던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현대건설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는 이른바 '중동특수'를 누려 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예멘 등 각 나라에서 수행한 다수 공사를 통해 1981년 '도급 한도액 1조원'을 돌파했다. 나아가 중동 특수 이후 건설이 집중된 동남아에서도 △싱가포르 창이공항 △파키스탄 차스마 수력발전소 △방글라데시 자무나 교량 등 대표 공사를 수행했다. 

◆유동성 위기에 '적통성' 둘러싼 경영권 분쟁까지

무려 40여년간 건설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현대건설은 2000년 전후로 일대 위기에 봉착했다. 

다수 공사를 수주한 이라크가 걸프전 여파로 경제제재를 당하자 공사대금 1조원 이상이 미수금으로 남아있던 현대건설은 이를 대손 처리하지 않다가 2000년 2조9800억원에 달하는 당기순손실로 기록되면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아울러 그룹후계구도를 둘러싼 이른바 '왕자의 난'까지 불거졌다.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5남 고 정몽헌 회장에게 현대그룹 경영권을 인계하고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자 2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반기를 든 것이다. 

현대건설이 1961년 신축한 무교동 사옥은 창사 14년 만의 첫 사옥으로, 당시로서는 손꼽힐 정도의 최신 설비를 갖춘 고층 건물이었다. © 현대건설


결국 적자 2조9000억원와 부채 4조4000억원을 안고 있던 현대건설은 2001년 워크아웃을 신청, 외환은행·산업은행 등으로 구성된 채권단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하지만 현대건설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특유의 기술력과 응집력으로 법정관리 체제 아래 구조조정을 단행하며 성실하게 체질개선을 이행하는 등 5년 2개월만인 2006년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한 것이다. 나아가 이후 해외건설 공사 수주에도 주력해 2009년 UAE 원전 공사 수주(31억달러 규모)로 최초 한국형 원전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다만 현대건설을 둘러싼 경영권 분쟁은 2010년 '경영 정상화' 이후에도 이어졌다. 공개 매각 시작 직후 정몽구 회장(현대차그룹)과 현정은 회장(현대그룹)간 '현대가의 적통'을 두고 치열한 인수전에 돌입한 것. 

당초 채권단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건 현대그룹이었다. 하지만 현대그룹 자금 여력 부족으로 매각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지위를 박탈, 현대차그룹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재선정했다. 이후 2011년 3월 인수합병 본계약이 체결됐으며, 2011년 4월1일 인수대금 완납으로 현대차그룹 계열사로 편입됐다. 

이후 현대건설은 해외건설 수주에 주력하며 5년간 고속성장을 이어왔다. 당시 해외에서 수주한 대형공사만 해도 △쿠웨이트 자베르 코즈웨이 해상교량공사 △베네수엘라 푸에르토 라크루즈 정유공사 확장·설비개선 공사 △이라크 카르발라 정유공장 공사 등 20~60억달러 이상 공사들이 많았다. 

그 결과 2013년 11월 국내 최초 '해외수주액 누계 1000억달러'를 돌파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2016년에는 쿠웨이트 알주르 LNG 수입터미널 공사(15억2000만달러) 수주에 힘입어 국내 건설업계 최초 영업이익 1조원을 달성하는 등 정 회장 이후 '제2의 전성기'라는 평가가 이어지기도 했다. 

◆매출 다변화 전략 "다양한 형태 사업 선도"

하지만 2017년 들어 성장세를 주춤하던 현대건설은 2020년 영업이익이 5000억원대로 떨어지면서 '업계 맏형' 체면이 구겨졌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건설통' 윤영준 사장이다. 2020년 12월 CEO로 취임한 윤 사장은 재개발·재건축·리모델링 사업까지 뛰어들면서 매출 다변화에 꾀했다. 

지난 2011년 현대건설 계동사옥으로 11년만에 출근한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 현대자동차그룹


이런 전략 탓인지 현대건설은 지난해 △매출(이하 연결 기준) 18조655억원 △영업이익 7535억원 △당기순이익 5495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대비 각각 6.5%, 37.3%, 141.3% 증가한 수치로, 또 다시 고공 성장을 이어 갈 모습이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올해 △매출 19조7000억원 △신규수주 28조3700억원에 달하는 실적을 이뤄낸다는 방침이다. 

현대건설 관계자는 "올해에도 풍부한 해외공사 수행경험과 기술 노하우로 기술적·지역별 경쟁력 우위인 공종에 집중하고, 도시정비사업 및 에너지 전환 신사업 등 다양한 형태 국내 사업을 선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회사의 권한 위임과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직원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대·내외 다양한 고객들과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행복한 조직 문화를 구축해 함께 성장하는 회사로서의 명성을 이어 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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