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건설사개론-포스코건설 총론] '역사는 짧지만, 강한 기업' 제철소 플랜트 태생의 28년간 행보

단순 설비 정비 통폐 수준 벗어나 주거 브랜드 '더샵'으로 주택 시장 입지 구축

전훈식 기자 | chs@newsprime.co.kr | 2022.07.19 14:03:20

당초 그룹 제철소 관련 공사를 위해 세워진 포스코건설은 도시정비사업 신규 수주 등 주택사업에 힘입어 정비사업 강자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 포스코건설


[프라임경제] 건설사들은 대내외 경제상황과 경영방향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거나 몰락의 나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일지라도 변화 바람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2, 3류 기업으로 주저앉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국내 산업 기틀을 형성하고 있는 건설사들은 급변하는 시대에 역행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건설강국을 이끌고 있는 건설사들을 탐방해 '건설사개론' 시리즈를 꾸린다. 이번 회에는 짧은 역사에도 높은 성과를 이어가고 있는 포스코건설의 지난 발자취에 대해 살펴본다.

'포스코 그룹 계열사'로 출범한 포스코건설은 여전히 대형 건설사들에 비해 주택 경험이 부족한 편이다. 또 '포스코'라는 든든한 모기업 지원에도 만만치 않은 난관에 직면해야 했으며, 여전히 계열사 특성상 모기업 상황에 크게 좌우되고 있는 처지다. 

하지만 포스코건설은 이런 단점을 극복하고 최근 도시정비사업 신규 수주 등 주택사업에 힘입어 정비사업 강자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도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대형건설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위상 높은 건설사로 평가되고 있다. 

◆'태생' 플랜트 기반 그룹 제철소 관련 공사로 시작

당초 그룹 제철소 관련 공사를 위해 세워진 포스코건설 '뿌리'는 1982년 4월 설립된 제철정비주식회사(이하 제철정비)에서 출발한 거양개발이다. 포항제철소 설비 대형화·합리화와 더불어 최신예 광양제철소 건설에 따라 늘어나는 제철 설비 정비 업무를 신속히 지원하고, 부수 설비·부품의 안정적 책임 공급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제철정비는 이전까지 포항제철소 각 설비 정비 업무를 담당했던 분야별 6개 업체를 통폐합한 것에 불과했다. 장비·인력 관리 체계화를 통한 단순화와 효율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기술개발과 축적, 그리고 책임정비를 꾀한 것이다. 

포스코건설은 1994년 12월, '건설 패밀리사' 거양개발을 존속회사로 △포스코 엔지니어링본부 △건설본부 △'엔지니어링 패밀리사' 포스코엔지니어링간 통합작업을 추진해 포스코개발로 재탄생했다. 사진은 포스코개발 현판식. © 포스코건설


다만 동양철관 포항공장 인수(1984년 6월) 이후 철구 영업을 개시한 포스코건설 모습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 사명을 '제철정비철구공업주식회사'(1985년 9월)로 변경한 이후 1987년 1월 해외 개척을 위해 캐나다에 현지법인 POSMC CANADA도 설립했으며 △미국 현지 합작법인 'UPI' 설비공사 △캐나다 HVC 파쇄기 공사 △일본 TMP공사 등을 수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포스코건설은 시장 다변화를 통해 '부족한 기술과 경험'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고, 자체 개발을 통한 경영 합리화와 기술혁신, 품질 향상 등을 꾀하는 등 국제기업으로의 면모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물론 건설사로의 자리 매김 과정에서 구조적 변화도 불가피했다. 1980년대 후반 광양제철소 본격 가동 이후 포항과 광양 '업무 이원화'에 따른 불편을 해소하고자 광양 정비 부문을 별도 법인(1989년 7월 · 현 포철플렌텍)으로 분리했다. 

이로 인해 △정비 △플랜트 △철구 △토건 4개 사업본부를 운영하던 포스코건설은 1991년 5월 정비와 플랜트본부를 합친 포항 정비 부문을 별도 법인화(현 POSMEC), 철구와 토건 사업 본부만을 운영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1992년 8월 또 다시 사명을 거양개발주식회사로 변경한 포스코건설은 본격적으로 건설회사로서의 변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업계 관계자는 "광양제철소 종합 준공을 앞두고, 그룹 내 건설 인력 활용 방안을 강구하다가 건설회사의 설립으로 발전한 것"이라며 "당시 비자금 조성과 부실공사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했던 건설업계에 정도경영을 실천하는 새로운 건설문화를 조성해 보자는 포스코 의도도 담겼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1990년대를 맞아 세계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세계화와 개방화가 가속화하면서 선진국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졌고, 엔지니어링과 시공 능력간 불균형으로 국내 건설업계는 전전긍긍했다. 이처럼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국내 건설사들은 엔지니어링이 가능한 종합건설회사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포스코건설 역시 E&C에 목적을 두고, 그룹 전략에 따라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순조롭게 착착 진행했다. 이에 따라 △'건설 패밀리사' 거양개발을 존속회사로 △포스코 엔지니어링본부 △건설본부 △'엔지니어링 패밀리사' 포스코엔지니어링(PEC) 통합작업을 추진해 1994년 12월, 그 의미와 정신을 더욱 확대한 포스코개발로 재탄생했다. 

물론 포스코개발 초창기 사업은 그룹 보유 부동산 관리 또는 철강 관련 플랜트 수주 등 모기업 의존성이 심한 편이었다. '국내 최초 민자(民資)사업' 인천공항고속도로 및 광안대교 건설 등이 당시 대표 사업이다. 덕분에 창립 이듬해인 1995년 시평 23위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순항을 시작했다. 

◆'위기 탈출' 향한 이미지 전환과 더샵 출격

포스코건설은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플랜트 △토목 △건축 △해외 각 분야에서 승승장구하며 차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업 확장에 나섰다. 다만 모기업에 의존하는 구조상 IMF로 인한 포스코 투자 축소가 포스코건설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IMF 이전인 1997년 1조8340억원에 달하던 수주액이 불과 1년 만에 4564억여원으로 급감했으며, 인도네시아 해외사업 공사 중단과 함께 야심차게 추진하던 분당 프로젝트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포스코건설은 이런 위기에 좌절하지 않았다. 재무구조 안정성 확보 차원에서 △서울 강남구 도곡동 부지 △강남구 삼성동 그린호텔 부지 △하와이 부지 매각 등을 추진했다. 아울러 핵심역량 기반으로 사업구조를 △철강 플랜트 E&C 분야 △제철소 관련 환경·에너지 플랜트 분야로 전문화하고, 산업 플랜트 E&C 분야 진출을 결정했다. 

포스코건설은 2002년 선보인 주거 브랜드 '더 샵(The #)'을 필두로 시장 내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사진은 최근 준공한 광주염주더샵센트럴파크. © 포스코건설


나아가 2002년 2월에는 사명을 현재 포스코건설로 변경하는 이미지 전환을 꾀하기도 했다. 

"건설회사 위상에 어울리는 이름으로 사명을 바꾼 만큼 고객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 것. 사명 변경을 계기로 회사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이 힘을 합쳐 나가자." -2002년 2월28일 당시 박득표 회장

사실 포스코건설은 철강 위주 플랜트 중심에서 초고층 빌딩·주택·대규모 SOC사업에 이르기까지 사업 범위를 확대하는 등 건설기업 면모를 갖췄지만 '개발' 이름이 고객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정립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소규모 기업 이미지와 사업 영역 모호성을 가진 '개발' 대신 대규모 기업 이미지와 함께 넓은 업무 영역 및 보다 진취적인 의미의 '건설'로 바꾼 것이다. 

포스코건설이 사명 변경과 함께 시장에 제시한 주거 브랜드가 '더 샵(The #)'이다. 반올림을 뜻하는 음악기호 '♯'에서 유래한 것으로, 반음 역할처럼 잠자는 곳과 일하는 곳의 사이에 다양한 가치가 창조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포스코건설은 더샵을 필두로 시장 내 입지를 굳건히 다지기 시작했다. 실제 더샵을 론칭한 2002년 포스코건설 시평 순위는 전년(13위)보다 6단계 점프한 7위. 이전까진 극심한 등락을 피하지 못했던 반면, 이후에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며 '10대 건설사'로의 자리매김에 성공했다. 

하지만 의외로 주택 시장 내 입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포스코건설 태생 자체가 그룹 제철소 관련 공사를 위한 '플랜트' 위주 사업"이라며 "실제로도 국내에서는 주택보단 인프라를 비롯한 발전 사업 등 비중이 컸으며, 해외 플랜트 사업을 비롯해 각종 토목 공사 등에 주력하며 성장을 거듭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연유 탓에 포스코건설은 다른 대형건설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주택사업 경험과 경쟁업체 견제 등으로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하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포스코건설은 자체 개발사업과 그룹 관련 사업으로 명맥을 유지하면서 후일을 도모했다.

◆'본격 송도 시대' 사업 전략 주택사업 중심으로 선회

"송도사옥 준공이 송도국제도시 개발을 더욱 본격화하는 서막이 되기를 기대한다. 인천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지역사회로부터 신뢰와 공감을 얻는 기업이 되고자 노력하겠다." - 정동화 전 부회장

포스코건설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2010년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2002년부터 심혈을 기울인 송도 국제업무단지에 사옥을 짓고, 2010년 사실상 '본사 이전'을 통해 송도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실제 2011년 대우건설과 대림산업(현 DL이앤씨)을 한꺼번에 제치고 시평 4위로 올라선 포스코건설은 2014년에는 3위까지 뛰어 최고 순위를 찍을 정도로 고공성장을 이어갔다. 

포스코건설 관계자는 "2011년 수주한 43억달러 규모 '초대형 프로젝트' 브라질 CSP 일관제철소 공사가 순위 상승에 큰 역할을 했다"라며 "현지 노동시장의 불확실성과 환율 리스크 등 조금만 차질이 생겨도 수백억원이 날아가는 엄청난 위험이 공존했으나 이를 감수할 만큼 탐나는 일감이었다"라고 설명했다. 

기쁨도 잠시. 포스코 그룹이 지속되는 글로벌 철강업황 부진 여파로 신규투자를 망설이자 2014년부터 그룹사 발주 물량이 급감했고, 10조원대에 이르던 포스코건설 연 매출은 급기야 2016년 7조원대까지 떨어졌다. 내수 매출 비중도 2014년 40%대로 떨어진 이후 매년 감소세가 이어졌으며, 해외 사업 대규모 손실까지 더해지는 그야말로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2016년 적자전환(영업손실 1800억원)을 피하지 못한 포스코건설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나섰다. 송도 사옥 포스코이앤씨(E&C)타워를 부영그룹에 매각, 산토스(SANTOS) CMI 등 종속기업 11개를 팔았다. 

포스코건설이 '브라질 철강석 공급업체' 발레 및 동국제강과의 합작을 이뤄낸 브라질CSP 일관제철소는 한국 건설사에 길이 남을 사상 최대 규모 제철플랜트 공사로 꼽힌다. © 포스코건설


사업 전략 역시 해외 사업에서 주택사업 중심 수주 전략을 통해 해답을 찾는 데 성공했다. 

포스코건설이 2019년 이뤄낸 도시 정비사업 수주액은 2조7452억원 상당. 이는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이다. 특히 당시 정비사업에서 '2조 클럽' 가입 건설사는 현대건설과 포스코건설이 유이했다. 여기에 주택분양도 2만가구 이상 이루면서 수주와 공급 모두 10대 건설사 가운데 상위권에 올랐다.

나아가 그동안 멈춰있던 송도사업 정상화라는 쾌거도 이뤄냈다. 

한편, 포스코건설은 이런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최근 '하이엔드 열풍'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하이엔드 브랜드 '오티에르(HAUTERRE)'까지 선보였다. 이는 '높은, 귀한, 고급'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HAUTE'와 '땅, 영역, 대지'를 뜻하는 'TERRE'가 결합된 단어로, 고귀한 사람들이 사는 특별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티에르 핵심가치는 △나만의 순간 △특별한 경험 △여유로운 공간 △주목받는 디자인이다. 철저한 고객중심의 맞춤형 설계,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주거 경험을 제공하며, 특히 공간배치와 디자인 면에서 타 아파트와 확실히 차별성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맨 위로

ⓒ 프라임경제(http://www.newsprime.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