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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루의 언어 에세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

 

이다루 작가 | bonicastle@naver.com | 2022.11.01 16:04:50
[프라임경제] 죽음과 탄생이 하나의 선처럼 이어진다면, 그것은 각각 처음과 끝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지점을 잇게 하는 순간의 집합체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삶은 점마다 꾹꾹 눌려진 고통이고, 상흔이었다. 눌려야만 찍히는 점처럼 삶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죽음보다 사는 것이 훨씬 어렵다. 

삶이 어렵기 때문에 매 순간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삶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고,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일 또한 지극히 고귀한 처세상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과정이며, 마땅히 겪어야할 마침표다. 이래저래 다양한 목표를 안고 서둘러 나아갈지언정 결국 모든 시간은 죽음이라는 이정표 앞에서 귀결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동반자이며 동지이며 구성원이다.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서둘러 죽음을 겪다 사라지고, 또 누군가는 죽음과의 분투에서 괴로워하며 삶을 연장한다. 또 누군가는 평화롭게 시간을 영유하며 무사를 바라고 산다. 제각각 삶의 질이 확연하게 다르지만 분명한건 모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을 향한 분투도 결국 내 차례가 될 것이고, 나의 지금의 안락함 또한 결국 누군가의 차례로 회귀될 것이다. 당신이 겪는 게 곧 내가 겪게 될 것이고, 내가 겪는 게 또한 당신이 겪게 될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된 지점을 향해 나아가므로, 하나의 점을 찍고 또 다른 점을 찍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기에, 다른 길로 가더라도 결국 한 길에서 만나야 하기에. 

그러니 타인의 아픔과 슬픔에 관해서 누구라도 내 일처럼 절실히 느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언젠가 나의 고통과 아픔에도 타인의 위로가 힘이 되어 나를 살릴 수 있게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순간을 공유하고 문화를 공유하며 하루에도 수없이 기뻐하고 슬퍼한다. 한 세대를 채워가는 공동체로서 같은 숨을 공유하고 살아가고 있다. 

먼 훗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를 누군가 기억했을 때 겨우 단 한명의 사람, 단 하나의 점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그저 하나의 집단, 한 세대, 전대의 사람들로서 우리는 그렇게 설명될 것이다. 그러니 겨우 생각이 다르다고 모습이 다르다고 혹은 환경과 수준이 다르다고 서로를 곁눈질하거나 도외시하면 안 된다. 어차피 내가 흘겨보는 그들도 나를 흘겨보는 그들도 모두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시간을 공유한 이상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살펴야 하고, 서로가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게 관심을 둬야 하며, 더는 쓰러지지 않게 제 손길도 내밀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잘 사는 것이 곧 우리 세대가 잘 사는 것이고, 당신이 뒤처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곧 우리 세대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그런 공동체의 감각과 의식이 잘 자리 잡혀야만 서로가 서로를 위하게 된다. 각자의 자리만 빛나게 닦는 들 모두가 빛나지 않는 이상 하나의 빛쯤은 대중 속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성원이자 부분으로서 전체의 균일함을 위해 애써야 한다. 죽음 앞에서는 나만의 것보다 우리의 것이 훨씬 가치 있게 정의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죽음도 가볍게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죽음이 곧 우리 세대의 죽음이고, 나아가 공동체의 죽음이니 모두가 애통하고 절실히 슬퍼야만 한다. 우리는 꼭 그래야만 한다.


이다루 작가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마흔의 온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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