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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4남매 맘'의 어린이날, 지갑 탈탈 가혹한 소비의 날

101년 전 색동회의 의지 '희망‧내일, 어린이를 위하라'

이수영 기자 | lsy@newsprime.co.kr | 2023.05.04 12:49:16
[프라임경제] 5월은 가정의 달이다. 첫 출발은 단연 5월 5일 어린이날이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인 꼬꼬마부터 제법 머리가 큰 초등학생까지 온전한 휴일로 즐길 수 있는 날. '4남매 맘(mom)'인 나를 비롯해 어린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가혹한 소비의 날이기도 하다. 

실제 어린이날 키즈카페, 놀이공원에서의 카드 결제 건수가 평소의 3배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 롯데카드


4일 롯데카드에 따르면 최근 6년 동안 5월 실내·외 놀이시설 업종의 하루 평균 결제 건수를 1로 산정, 일별 결제 건수를 지수화해보니 주말 평균은 1.58이었는데 어린이날은 2.78에 달했다.

어린이날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에서 부모들의 씀씀이가 커지는 건 일견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석가탄신일(1.77), 대체 공휴일(1.86)에 비해서도 크게 높다는 점에서 '어린이날=애들에게 돈 쓰는 날'로 인식이 굳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올해 101번째를 맞은 어린이날의 시작은 부모의 부채감을 자극하는 소비나 속 편한 외유와는 전혀 무관하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 속 어린 세대를 통해 독립의 희망을 잡으려 한 게 어린이날의 시작이었다. 특히 어린이도 어른처럼 저마다의 인격이 있으며 미래의 희망임을 어른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날이었다.

처음 어린이날이 선포된 건 1922년이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이듬해 소파 방정환을 주축으로 설립된 색동회가 첫 어린이날 행사를 주최하면서다. 이날 행사의 표어는 크게 두 가지.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매년 전국 단위로 행사가 커지자 일제는 1937년 소년단체 해산명령을 통해 어린이날 행사를 금지하고 일요일까지 학교 수업을 하며 어린이들이 행사에 나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어린 세대의 민족의식과 독립 의지가 높아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후 한 세기가 흘렀다.

대한민국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명목 GDP 1조7219억 달러로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의 면모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동시에 '어린이는 국가의 미래'라는 말이 관용적 표현이 된 한편 강박적인 소비가 그날의 의미를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100여년 전 암울한 현실에서 미래 세대를 통해 희망을 찾고자 했던 색동회와 어린이날의 시작을 돌아보게 된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어둡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려면 역시 숫자만 한 게 없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을 가늠할 대표적인 수치가 무역수지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 정부가 출범한 지난해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우리나라 무역수지는 -660억 달러. 123억 달러 흑자였던 1년 전에 비해 783억 달러를 까먹은 셈이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단 한 번도 적자를 낸 적 없던 대(對)중국 무역수지가 231억 달러 흑자에서 388억 달러가 줄어 –157억 달러로 적자 전환했다. 전체 무역수지 감소폭의 절반이다.

참고로 흔히 무역수지 관련 뉴스에서 부진 원인으로 꼽히는 반도체 수출액은 1111억 달러, 1년 사이 261억 달러 줄어든 정도라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우리네 지갑 사정은 어떨까. 올해 1분기 카드사들의 실적발표를 들여다보니 30일 이상 연체채권 비율을 뜻하는 연체율이 일제히 1%를 넘었다.

보통 연체율 2%를 위험수위로 보는데 상승 추이가 매우 가파르다. 카드빚을 내는 이들 중 상당수는 신용도가 낮아 은행 대출이 어렵거나 이미 여러 곳에서 빚을 낸 고위험차주들이다.

역시 저신용자들이 주로 찾는 저축은행, 대부업체 연체율은 더 심각하다. 작년 말 3.4%였던 79개 저축은행 평균 연체율은 올해 1분기 5.1%로 뛰어올랐다. 지난 2월 기준 25개 주요 대부업체 평균 연체율 역시 전년 대비 3.5%p 급등한 10%에 달했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발표한 국내은행의 2분기 가계 신용위험지수 전망치는 42. 카드사태가 터진 2003년(44)에 육박할 정도다.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해 신용대출 등 빚을 못 갚을 가능성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이다. 

이런 가운데 2015년 미국경제연구소(NBER)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침체 1~4분기 전부터 출산율이 서서히 떨어지다 경기침체기 초반 더 빠르게 하락했다고 한다. 이는 임신중절이나 태아 사망이 늘어나서가 아닌 임신 자체가 줄어든 탓이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은행이 내놓은 분석에서도 출산율 저하-경기하락 사이 1년의 시차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이를 물질적이든, 정서적이든 풍족하게 키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임신을 꺼리고 실제 일정 시차를 두고 경기침체가 시작됐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꾸준히 하락해 작년에 0.78 역대 최저치를 찍었고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서도 꼴찌였다. 일련의 연구 결과에 비춰 적어도 1년 뒤 더 큰 경기침체, 경제적 위기가 삶을 더 옥죌 수 있다는 불길한 예언이다. 

어렵다. 사는 게 힘들다.

극도의 양극화가 콘크리트처럼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부문을 지배하는 요즘. 가난한 지갑을 강박적으로 터는 공휴일로서가 아닌 100년 전 어린이는 희망의 씨앗이라 외친 '어린이날'의 진짜 의미가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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