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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사관학교 현판을 내려라"

 

이종엽 발행인 | lee@newsprime.co.kr | 2023.09.06 11:17:19
[프라임경제] 필자의 집에서는 올해 11살인 아들이 지난해부터 국경일 때 태극기 다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단순히 태극기를 다는 행위를 넘어 그날의 의미를 알고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시킨 일이다. 

평일 오전 7시 풍경이다. 필자와 아들은 각자 식탁 한켠에서, 아들은 어린이 신문을 반대편 필자는 어른(?) 신문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신문에 나오는 어려운 단어나 인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는 요목조목 설명해주면서 그렇게 30분을 보낸 후 아침 식사를 한다.

지난 광복절날도 TV에 나오는 기념식과 노래 등 행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연이은 축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도중에 말문이 막혔다. 

필자는 아들이 열살이 되던 지난해부터 대화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일제시대'라는 표현 대신 '항일무장투쟁기'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대화하면서 아들이 내린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지구 최강의 착한 전투민족'이다. 나름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기에 동의했다. 

최근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과 관련해 사실상 '역사 논쟁'이 시작된 듯 하다. 그것도 경술국치일 전후해 시작된 이번 논쟁을 굳이 이 자리에서 논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Korea Military Academy)'. 

지난 20세기, 육군사관학교는 질곡의 역사 중심에 있었다. 소위 군사권력, 군부정권, 신군부 세력 등 본명칭 보다 별칭이 더 익숙했다. 그와 관련된 논의 또한 이 글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 '사관학교'라는 일본식 조어가 아직도 대한민국 수호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불편을 넘어 불쾌하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필자는 지난 20여년간 관련된 이야기를 주변에 했지만 이미 고착화된 단어를 바꾸는 것이 쉽지 않으니 그 의미를 잘 살려 후손에 물려주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士官'이라는 단어는 쓰인 적이 없다. 오직 일본에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주의 시대에 쓰인 '찌꺼기' 같은 단어다.

'士官'은 일본 봉건시대 무사(武士)의 개념으로 광의의 사무라이(侍, さむらい)로 통칭된다. 무관은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8~1185년)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한 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8년) 부터 중하급 관인으로 활동하거나 귀족을 섬기는 일종의 기능직으로 활동하면서 고착화된 단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즉시 병학교(兵學校)를 설립, 6년 후 유럽의 교육제도를 본 따 1874년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學校, Imperial Japanese Army Academy)를 개교했다.

이 대목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영문식 표기이다. 과거 에도시대에서 이어져온 사무라이 개념을 일왕을 보위하는 무사인 사관으로 표기해 제국주의 시대 이들을 양성하는 기관을 만든 것으로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즉, 사무라이들이 사라졌으니 다른 명칭으로 초급 장교를 양성하자는 것이 주목적인 셈이다.

독립운동가 이은숙 여사가 집필한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서간도 시종기)' 1981년 초판본 ⓒ 프라임경제


비슷한 시기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자. 조선과 대한제국은 기본적으로 '士官'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대신 '무관(武官)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광무황제 시기인 1896년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가 설립되지만 경술국치를 앞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육군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이후 항일독립의 최선봉에서 맹활약을 했다. 이들 졸업생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좌진(청산리대첩 지휘관), 신규식(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신팔균(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 오영선(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부장), 이장녕(대한독립군단 참모총장), 이동휘(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등이다.

경술국치 이후 항일의 전선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 중국 본토, 연해주 등 널리 퍼지면서 육군무관학교는 우당 이회영 선생과 독립투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신흥무관학교'로 재탄생됐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 뿐 아니라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 양성을 위해 국어, 국사, 지리 등의 교육도 함께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찬란한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이며, 이들과 함께한 의병들은 이후 '대한독립' 하나의 기치 아래 찬란한 전공을 이뤄냈다.

경술국치 직후 신흥무관학교가 만들어진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은숙 여사(1889~1979)께서 쓰신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서간도 시종기)'는 독립운동기지를 만들면서 겪은 수많은 고초들이 생생히 적혀있다. 

필자는 이은숙 여사 사후 1981년 발행한 초판본을 학창시절부터 간직하며 수 없이 읽으면서 당시 뜨거운 민족애와 항일의지에 지금도 숙연해진다. 

이 책에서 나온 무관학교와 신흥무관학교와 관련된 대목을 살펴보자. 

"우당장은 학교 간역(幹役)도 하시며,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라 하였다. 발기인은 우당 이회영씨, 석오 이동녕씨, 해관 이관직씨, 이상룡씨, 윤기섭씨, 교주(校主)는 영석 이석영씨, 교장은 이상룡씨였다. 이분은 경상도 유림단 대표로 오신 분이고, 이장녕씨, 이관직씨, 김창환씨 세 분은 고종황제 당시의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으로 승급을 최고로 하던 분이다. 이 분들은 대소한 추위에도 새벽 세시만 되면 훈령을 내려 만주에서 제일 큰 산을 한 시간만에 돌고 오는 지라, 세 분 선생을 '범 같은 선생'이라 하더라."

만세토록 억조창생에게 길이 남을 봉오동·청산리대첩은 육군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의병들이 피와 눈물로 만든 항일무장투쟁의 쾌거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의 DNA를 가진 대한민국의 청년들이 '사관학교'라는, 오로지 일왕에게 충성하는 군인으로 양성되는 굴욕과 오욕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덧대여 이어져 오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현재 대다수의 중장년층들이 졸업한 '국민학교'가 일제의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 늦었지만 올바른 이름을 찾기 위해 '초등학교'로 변경한 바 있다.

20세기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제 큰 의미가 없는 듯 하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지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답을 요구받고 있다.

끝으로 지난달 아들과 함께 시청하던 광복절 경축식은 축사가 나오는 도중에 TV를 꺼버렸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아직도 아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이종엽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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