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코로나19 팬데믹이 몰고 온 소비 행태의 변화는 명품 산업에도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오프라인 부티크를 벗어난 소비자들은 클릭 한 번으로 수백만 원대 명품을 구매했고, 그 수요는 스타트업 기반 명품 플랫폼들의 폭발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성장'이 '지속 가능성'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코로나 시기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온라인 명품 시장은 고금리·고물가·고환율에 얼어붙은 소비심리로 직격탄을 맞으면서 1세대 명품 커머스로 꼽히는 '머트발(머스트잇·트렌비·발란)' 위기설이 불거지고 있다.
최근 온라인 명품 플랫폼 업계의 위기감은 단순한 조정 수준을 넘어선다. 가장 먼저 온라인 명품플랫폼 '발란'은 입점 업체에 대한 대금 미지급 사태로 지난달 28일 거래를 중단하고 기업회생절차에 돌입했다. 발란의 월평균 거래액은 300억원 안팎으로, 전체 입점사는 1300여개다.
2023년만 해도 약 3200억원의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2년 만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최근 기업가치는 2년 전 기업가치의 10분의 1 수준인 300억원가량으로 떨어졌다. 지금까지 700억원의 투자금을 받은 발란은 출범 후 한번도 흑자를 내지 못한 채 최근 75억원 투자 유치에도 미정산 사태를 초래했다.
미정산 사태를 일으킨 발란은 결국 회생절차를 신청했고, 서울회생법원 회생15부는 지난 4일 발란의 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했다. 회생계획안 제출 기한은 6월27일까지다. 법원은 이를 검토한 후 회생 인가 여부를 결정한다.
법원은 발란이 플랫폼 사업 초기 성장에 필요한 마케팅 비용과 고정비 지출로 영업적자가 누적됐고, 티메프(티몬·위메프) 사태 등으로 인한 플랫폼 산업 신뢰도 하락 등으로 거래 규모가 축소하고 매출이 급감했다고 설명했다.
발란 측은 "불가피하게 회생 절차를 택했으며, 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지만, 채권자 신뢰 회복은 간단치 않아 보인다. 플랫폼의 수익모델이 구조적으로 취약했던 만큼, 단순한 자금 수혈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발란과 함께 '머트발'로 불리는 머스트잇과 트렌비 역시 적자가 지속되는 중이다. 같은 기간 머스트잇과 트렌비의 영업손실은 각각 79억원, 트렌비 32억원이다. 이들 역시 지난해 실적은 아직 공시하지 않았지만, 적자를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바일 빅데이터기업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머트발 등 명품 플랫폼의 카드 결제액은 2022년 9245억 원 수준에서 지난해 3758억 원으로 59% 급감했다.
온라인 명품 플랫폼 업계의 미정산 우려가 커지자 머스트잇과 트렌비는 잇따라 재무제표를 공개하며 입점 판매자 우려 불식에 나섰다.
머스트잇은 지난 2일 판매자들을 위해 정산주기를 구매 확정 후 최대 7영업일 이내로 단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최근 발란 등 일부 명품 온라인 플랫폼이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한 것을 고려한 판단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현재 정산 주기는 3∼9영업일이지만, 오는 14일부터 판매 등급이 높은 파트너사는 구매 확정 후 다음 날 정산받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머스트잇은 투자 유치를 본격화한다고 밝힘과 동시에 매각설에 휩싸이기도 했다.
머스트잇은 현재 삼정KPMG를 주관사로 선정하고, 시리즈C 단계의 전략적 투자 유치 절차를 본격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투자 유치는 유의미한 지분 투자를 전제로 한 논의로, 장기적 성장 파트너십 구축을 핵심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머스트잇은 지난 시리즈 A·B 라운드를 통해 IMM인베스트먼트, 소프트뱅크벤처스, 카카오인베스트먼트, CJ ENM 등으로부터 유의미한 투자를 유치한 바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브랜드 자산과 시장 내 입지를 빠르게 성장시켜왔다.
머스트잇 관계자는 "이번 투자 유치는 단기 유동성 확보가 아닌, 유의미한 지분 참여를 전제로 장기 성장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일각에서 제기된 매각설에 대해서는 "회사는 안정적인 재무 구조와 여유 자산을 기반으로 외부 인수 제안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나,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협의 중인 사안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트렌비 또한 발란의 위기를 의식한 듯 지난해 12월 결산된 재무제표를 공개하며 건강한 재무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달 25일 공개된 트렌비의 2024년 결산 재무제표에 따르면, 당좌자산이 약 80억원에 달하고, 이 중 파트너 정산 예정부채 35억원을 뺀 현금성 안전자산이 약 45억원으로 파악됐다. 파트너 지급 예정 건의 2.3배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머스트잇과 마찬가지로 4월 한 달간 정산주기를 앞당긴다. 트렌비는 기존 2~3주 걸리던 정산금액을 1~2주 안에 지급할 방침이다. 오는 9일과 16일, 23일에 정산이 이뤄질 예정이다.
트렌비 관계자는 "현재 자금 상황과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업계에서도 가장 빠른 3주 이내의 정산을 지속하고 있다"며 "파트너사와의 신뢰 유지 뿐 아니라,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쇼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재무적으로도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머스트잇과 트렌비의 기존 정산주기를 앞당기며 발란 사태를 의식하고 있지만, 업계 전반의 신뢰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최근 1년 새 4곳의 명품 플랫폼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캐치패션이 신규 투자금 유치에 실패해 문을 닫았고, 1세대 명품 편집숍 한스타일도 비상경영에 돌입해 왔지만 결국 8월 사업을 종료했다. 12월에는 이랜드글로벌이 운영하던 명품 플랫폼 '럭셔리 갤러리'가 운영을 중단했고 올해 초에도 명품 프리 오더(선주문) 플랫폼 '디코드'가 사업을 접었다.
기성 유통 공룡들이 자사 이커머스에 명품 카테고리를 강화하고 있는 것도 악재다. 롯데온의 '온앤더럭셔리', SSG닷컴 'SSG럭셔리'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그동안 백화점과 면세점을 운영해온 노하우로 철저한 검증은 물론 다양한 상품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특히 국내 이커머스 1위 쿠팡도 최근 럭셔리 뷰티 서비스 '알럭스'를 론칭해 명품 플랫폼의 기능 역시 강화 중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위기를 기점으로 업계 재편이 가속화될 것으로 본다. 살아남을 수 있는 플랫폼은 단순 중개가 아닌 '신뢰 기반의 유통 플랫폼'으로 체질을 바꾸는 곳뿐이라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연예인 마케팅과 가격 할인 경쟁만을 내세운 플랫폼 전략은 일시적 매출 증가는 가능하게 했지만,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진 않는다"며 "무리한 외형 확장보다는 내실을 다지며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